일할 수 없는 여자들
5화

더 많은 여성이 일할 수 있도록

한국은 성 평등 사회가 아니다


한국 사회의 성차별은 심각한 수준이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곳곳에서 많은 분들이 미래 세대에게 더 평등한 사회를 물려주기 위해 일하고 있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성 인지 예산 제도와 성별 영향 평가 제도가 대표적인 예다. 전자는 같은 예산이 여성과 남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예산 편성에 그 결과를 반영해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예산의 수혜를 받도록 하는 제도다. 후자는 법령, 계획, 사업 등 주요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여성과 남성의 특성이나 경제적 격차 등을 분석하는 제도다.

두 제도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성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정책이다. 성 주류화는 여성이 사회 모든 영역에 참여해 목소리를 내고, 의사 결정권을 갖는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일을 말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 제도가 시행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제도가 필요한지를 묻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모든 국민을 위한 예산서를 쓰면서 꼭 성 인지 예산서까지 만들어야 하는지 비판하는 연구자나 공무원이 있다. 성 주류화 정책의 필요성에 반감을 갖는 이들의 대다수는 제도의 목적과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여자들이 더 살기 좋은 시대가 됐는데, 이런 것까지 해야 하느냐며 볼멘소리를 한다.

이들은 한국 사회에 성차별이 만연하다는 사실을 일부러 외면하는 것 같다. 여성들은 노동 시장의 주변부에서 중첩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남성 중심의 연공서열이 공고화된 조직의 유리 천장은 높고도 두껍다. 여성이라는 성별은 채용 단계에서부터 꼬리표처럼 따라온다. 취업 포털 사람인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채용 면접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성별과 관련한 질문을 세 배 이상 많이 받는다고 한다. 남성에게는 야근에 대한 생각을 가장 많이 묻는 반면, 여성에게는 결혼, 출산 계획을 질문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애인과 사귄 기간이 얼마나 되느냐”,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둘 생각이냐”, “업무상 긴급 상황이 생겼는데 아이가 아파서 울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는 식의 질문들이 집요하게 날아든다.

아이가 있는 여성이 회식 자리에서 빠지거나, 정시에 맞춰 퇴근하는 것을 두고 근로 의욕이 낮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아이를 돌보는 여성의 역할을 중요시하면서 막상 아이를 위해 직장 생활의 일부를 포기하는 여성들을 질타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누군가는 아빠가 휴직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쉽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이 남성에 비해 대체로 임금이 낮은 구조하에서 부모 중 한쪽이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면 여성이 손해를 감수할 가능성이 크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아이는 여성이 돌봐야 한다는 모성에 대한 막연한 기대다. 사회 전반의 학력 수준이 높아지고, 맞벌이 가정이 늘고 있는데도 돌봄 시장이 충분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은 것은 의아한 대목이다. 미국의 경우 직장인 여성이 고용할 수 있는 베이비시터, 가사도우미 등의 집안일 외주화 시장이 충분히 형성돼 있다. 고연봉자가 아니더라도 시장에서 합리적인 가격에 서비스를 구매해 이용할 수 있다. 한국에서 아이를 맡기기 위해서는 공공 보육이나 가족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도 아이는 엄마가 보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회적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직장 내의 성차별을 극복하려 분투하는 여성은 독한 사람이 된다. 성차별에 항의하면 사내 분란을 조장하는 피곤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차별을 적극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면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다. 더 많은 여성이 평등하게 일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성차별 실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차별 해소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누구나 일할 수 있는 나라


2017년 우리나라 교육부는 ‘모든 아이는 우리 모두의 아이’라는 홍보 문구를 만들었다. 이 슬로건은 약 50년 전인 1970년대 스웨덴에서 먼저 나왔다. 당시 스웨덴 정부는 보육 서비스를 확장하면서 ‘모든 아이는 모두의 아이(alla barn är allas barn)’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스웨덴이 보육 서비스를 확장하게 된 계기는 여성의 이중고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확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스웨덴은 2000년대까지 두 차례의 경제 위기를 겪었다. 1970년대의 오일 쇼크와 1990년대 초의 금융 위기다. 위기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은 복지 정책을 축소하지 않고, 관대한 가족 정책, 젠더 평등을 위한 정책을 고수했다. 경제 위기 전부터 누구나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룩했기 때문이었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일하고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여성 인권 신장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었을까. 그 요인으로는 크게 네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조직화된 여성 운동의 영향력, 여성 노동의 가시화, 돌봄 서비스의 확충, 그리고 여성의 일자리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회적 합의다.

가장 먼저 여성 운동의 영향력에 대해 알아보자. 스웨덴에서도 출산과 양육은 여성의 기회를 제약하는 대표적인 문제였다. 스웨덴에서는 1970년대부터 아버지가 혼자 밖에 나가 돈을 벌고, 어머니는 집에서 아이를 기르고 집안일을 하는 남성 생계 부양자 중심의 가족 모델이 사라지고 맞벌이 가정이 일반적인 모델로 자리를 잡았다.[1]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스웨덴 여성이 정책 결정 과정에서 주요한 행위자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여성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온건하고 계몽적인 방식으로 관철시켜 남성 생계 부양자 가족 모델을 지지하는 세력과의 마찰을 유연하게 줄여 나갔다.[2]

1970년대부터 스웨덴 전역에서 다양한 단체가 만들어졌다. 스웨덴 여성 운동 역사에서 제2의 파도라 불리는 이 시기의 주요 의제는 여성이 가사 노동과 직장 일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구조를 타파하는 것이었다. 1968년 조직된 ‘그룹 8’은 대표적인 여성 운동 단체다. 주요 멤버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사 노동이라는 이중고를 감당하는 30~40대 여성이었다.[3] 이 단체를 시작으로 여성 운동의 주류가 중산층 지식인에서 유자녀 여성으로 옮겨 가게 됐고, 여성에게 이중적 부담을 지우는 부당한 사회 구조에 대한 반발이 더 거세졌다.

특히 낮은 임금에 불만을 가진 여성들의 움직임은 봉기 수준으로 발전했다. 산업 현장의 저임금 여성 노동자뿐만 아니라, 병원 업무나 비서직 등 서비스 현장에 종사하는 여성 노동자들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계급 문제와 여성 차별 문제를 지적했다. 전통과 역사를 지닌 여성 조직들과 사회민주당 여성위원회도 일부 지역에서 새롭게 등장한 진보 여성 운동에 합류했다. 이들은 공공 보육 시설의 증축 문제, 성추행 등 직장 내 성차별에 관한 조사, 여성의 실업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지적했다.

1990년대에는 제3의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 지난 여성 운동과 궤를 같이 하면서도 여성의 기본권과 성 평등을 정치적 이슈로 승격시켰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이 시기의 여성 운동은 대규모의 시위나 모임 같은 표출 방식보다는 논리를 강조한 책이나 간행물, 비디오 등을 매개로 하는 온건한 태도를 취했다. 강력한 파급 효과로 단기간에 변화를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여성주의가 부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가장 큰 성과는 주요 정당이 여성들을 공천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당시 선거 결과 여성 의원의 비율은 33.5퍼센트에서 41퍼센트로 성장했다.[4] 2000년에는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43퍼센트까지 상승했고, 장관직의 절반이 여성에게 할당될 정도로 여성의 정치적 힘이 신장될 수 있었다.

실제로 스웨덴 의회에서 설문 조사를 하면, 남성 의원들보다 여성 의원들이 사회 복지 정책을 우선시한다고 한다.[5] 여성 운동을 통한 여성의 정치적 성장이, 여성의 이해를 반영한 정책 형성과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선순환 구조를 보여 주는 사례다.

노동조합은 1990년대 스웨덴의 여성 운동이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전까지 스웨덴 노동조합 총연맹(LO)의 정책 기조는 여성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이들은 성차별과 여성 문제를 정면으로 지적하기보다 중립적인 자세로 남성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쪽에 가까웠다. 노동 조합 총연맹의 핵심 세력이었던 금속 노조 대부분이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 운동이 확산되면서 노동조합의 성격에도 변화가 생겼다. 1980년대 이후 금속 노조의 세력이 약화되고 있었다는 점도 주요 요인이었다. 수출 중심의 금속 노조 노동자들이 탈퇴하며 노동조합 총연맹에서는 내수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서비스 부문 조합원의 중요성이 높아졌다.[6] 서비스 부문 종사자 중에서도 여성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지방 자치 단체 노조(kommunal)의 세력이 강했다. 지방 자치 단체 노조 조합원의 대부분은 공공 부문 복지 서비스에 종사하는 여성이었다. 이들은 총연맹 내에서 여성 조직을 만들거나, 여성이 사업장 단위에서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을 장려했다.[7]

여성의 대표성이 높아지자 공공 부문 돌봄 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블루칼라 노동자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이들은 임금 평등이라는 공식적 목표를 세웠다. 돌봄 노동의 구조와 체계를 개혁하고자 했으며, 장기적으로는 여성의 임금 향상을 위한 기술력 제고, 재직 훈련, 책임 증대 등 숙련도를 높이기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파트타임 분야에서는 여성의 시간제 일자리가 계급 문제라는 점을 이슈화했다.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파트타임 일자리가 여성의 문제이자 계급의 문제라고 강조하며, 블루칼라 노동자가 파트타임에 종사하는 현상이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저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파트타임 노동은 공공 부문의 저임금 문제보다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다. 구체적인 정책들은 스웨덴에서도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공공 부문의 여성 파트타임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한 것 자체에서 커다란 진보가 이뤄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스웨덴 여성의 정치적 역량이 확대되고, 양성 평등의 제도화나 유자녀 여성 고용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자연스레 아동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이해도 포괄적으로 발전했다. ‘모든 아이는 모두의 아이’라는 표어는 전국적으로 퍼졌다. 정부는 자녀 돌봄에 대한 부모의 선택권을 존중하면서도, 사회가 아이를 잘 길러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일하는 부모를 지원하고, 부모가 아이를 돌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돌봄 관련 서비스가 확충됐다.

스웨덴은 1970년부터 공공 보육 시설을 대폭 확대했지만 증가하는 보육 수요를 완벽하게 충족할 수는 없었다. 공공 보육 시설의 이용 권리는 모든 부모가 직장에 다니는 아동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졌다. 보편적인 공공 보육이 확충된 계기는 스웨덴 의회가 1977년 통과시킨 아동법 제정이었다. 아동법은 보육 시설 증설에 대한 지방 정부 책임을 강화하고, 이 모든 과정을 국립 보건원이 감독하게 했다. 1982년에는 아동법이 사회 복지법으로 통합됐다. 중앙 정부는 어린이집과 가정 탁아(familjedaghem)라 불리는 사설 보육 기관까지 보조금을 지원해 아동 돌봄의 유형을 다양화했다. 공공 영역이 민간 영역까지 포함해 정책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아동 정책 발전사에 획을 긋는 성과였다. 철저히 공익성을 기준으로 지원 대상으로 선정했고, 영리 기관은 배제했다. 이런 노력을 통해 1974년에는 6만 2000명에 불과하던 보육 아동의 수가 1985년에는 26만 6000명으로 증가했다. 보육 서비스의 확대가 일으킨 변화는 놀라웠다. 1980년 노동 시장에 참여하고 있는 25~34세 여성의 비율은 무려 81퍼센트에 달했다.[8]

양적 확대뿐만 아니라 공공 보육의 질적 수준도 고려했다. 국립 보육위원회는 양육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부모들의 참여를 방해하는 요인이 장시간 근로라는 점에 공감했다.

스웨덴 정부는 부모 보험 제도를 통해 부모가 가정과 직장을 양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부모 보험 제도는 아이를 둔 부모가 휴가를 신청하거나 노동 시간 단축을 선택할 수 있는 제도다. 여성들만 사용할 수 있었던 육아 휴가를 대체하여 시행된 것으로, 두 종류의 지원 정책이 있다. 하나는 자녀 출산과 관련된 부모 급부금(parental allowance)이다. 부모 급부금은 자녀가 여덟 살이 될 때까지 언제나 받을 수 있고, 이 시기에는 근로 시간도 절반이나 4분의 1로 조정할 수 있다. 부모 급부금은 부모가 근로 시간을 줄이고 집에서 자녀를 돌볼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제도다. 1974년 6개월이었던 사용 기간은 1986년 12개월로 늘었다. 자녀의 나이 차가 적을수록 유리하다. 첫째 아이를 낳은 후 24개월 이내에 둘째 아이를 출산할 경우, 첫째 아이를 낳기 전의 소득을 기준으로 부모 급부금이 계산되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안정적인 직장과 소득을 확보한 후에 자녀를 낳고, 다음 자녀도 연이어 갖게 하는 효과를 위해 설계된 제도다.

다른 하나는 부모가 아픈 자녀를 돌볼 때에 배정되는 일시적인 급부금이다. 일시적 급부금은 12세 이하의 자녀가 아프거나, 규칙적으로 자녀를 돌보는 사람이 아플 때 사용할 수 있는 제도다. 아이 한 명당 60일까지 소득의 80퍼센트가 부가 수당으로 지급된다.

그러나 부모 보험 제도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남성의 육아 휴직률은 좀처럼 높아지지 않았다. 실제 보험 제도의 주 사용자는 여성이었다. 이런 결과에 대응해 스웨덴 정부는 전통적인 성 역할을 변화시키기 위한 강력한 정치적 조치를 마련해 나갔다. 1995년에 스웨덴 의회는 양도가 불가능한 한 달간의 부모 휴가를 도입하기에 이른다. 아버지가 아니면 활용 할 수 없게 규정된 육아 휴직은 ‘부친 쿼터’로 불리며 2002년에는 2개월로 늘어났다.

육아 휴직 외에도 자녀 양육의 시간을 연장하기 위한 정부의 다각적인 지원이 있었다. 스웨덴에서는 1979년부터 어린 자녀를 가진 부모는 하루에 6시간까지 근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정책을 시행했다. 공공 부문의 여성 중심 직종뿐만 아니라 일반 기업도 우수한 여성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일하기 쉬운 업무 환경을 갖추고자 노력했다. 무엇보다 노동조합이 근로 시간을 철저하게 관리했기 때문에 정시 출근-정시 퇴근은 일반적인 직장 풍경이 됐다.

근로 시간 단축을 통한 맞벌이 부부 지원의 방향은 파트타임 일자리의 증가로 연결됐다. 스웨덴의 시간제 일자리는 어머니와 근로자라는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의 결과물이었다. 실제로 파트타임 근로의 확대는 여성의 고용률 증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스웨덴에서 전업주부 비율이 급격히 줄어든 시기인 1970~1980년대, 경제 활동을 하는 인구에서 파트타임이 차지하는 비율이 크게 상승한 것이다. 1981년에는 7세 이하 아동을 둔 여성 근로자의 66퍼센트가 시간제로 일하고 있었을 정도로 그 비율이 높아졌다. 이 시기의 시간제 노동은 더 이상 1960년대의 좋지 않은 일자리가 아니었다.

스웨덴은 꾸준히 여성의 노동 시장 참여,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한 다양한 제도를 발전시키고 있다. 스웨덴은 모든 아이는 모두의 아이라는 표어를 실현해 나가고 있다. 여성의 일자리 문제는 단순히 여성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모두의 문제로 인식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한국 사회의 발전주의 체제는 노동 시장의 이중 구조화를 가속화하고, 남성 중심의 내부 노동 시장과 정규직 중심의 제한적 사회 복지를 발달시켰다. 남성 노동자를 선호하는 대기업 중심의 숙련 흡수 현상으로 고등 교육이 과잉 팽창됐지만, 한국의 여성은 미국의 여성들처럼 고등 교육에 따른 고용 프리미엄도 얻을 수 없다. 한국은 수직적인 성별 분리뿐 아니라, 수평적 성별 분리도 강하게 나타나는 사회다.

여성들의 일자리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한국 여성 운동의 조직화된 힘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여성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은 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스웨덴과 같은 연대의 정치도, 미국처럼 고학력 여성들의 노동 시장 참여를 독려할 강력한 시민 사회의 목소리도 미약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을 높임으로써 제도권 내에서 여성 운동이 제 역할을 발휘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유리 천장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려면 성 주류화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 제고도 필요하다. 기업이나 정치 영역에서 여성 인력 할당제와 같은 정책이 운영되고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구색 맞추기에만 급급하다. 여전히 주요한 정책 의제에서 여성의 참여는 그리 많지 않다. 제도의 취지에 대한 인지도가 높지 않고 영향력도 적다. 관련 정책을 여성들만의 논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합의를 위한 테이블에 올릴 수 있는 과제로 인식해야 한다.

나아가 남녀가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출산율 제고 정책은 가임기 여성 달래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모양새다. 지방 정부는 가임기 여성 인구에 민감하다. 저출산 문제를 겪고 있는 일본 등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젊은 층의 출산 의지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출산율이 문제가 된다면, 일자리에서 남녀의 지위 경쟁을 유발하는 장시간 근로를 감소시키는 정책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최근 근로 시간 감소와 관련된 논란이 뜨겁다. 주 52시간 정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근로 시간 조정 정책은 분명 일과 가정의 양립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근로 시간 정책이 다양한 노동 현장에서 유연성을 갖고 시행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설계 방식이 필요하다. 장시간 근로를 선택하려는 개인의 자유를 단시간 내에 일괄적으로 뺏기는 어렵다. 따라서 장시간 근로를 막는 것이 일자리 창출과 같은 노동 시장의 일자리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자녀 돌봄의 문제를 남녀 모두가 분담함으로써 여성들의 위험 부담을 줄여 줄 수 있는 방안이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이뤄야 한다.

다만 한국 노동 시장 특성을 고려할 때 어떠한 돌봄 지원을 확대해야 하는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기업 특정적 숙련 체계가 잘 유지되고 있으므로, 육아 휴직 정책보다는 공공 보육 정책을 확대함으로써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를 지원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경력 단절 기간 동안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의 질적 향상도 필요하다. 기업 내부에서 장시간 노동 등의 문제가 해결되어 남녀 모두가 동등한 경쟁을 펼칠 수 있는 시기가 와도, 여성에게는 아이 돌봄 문제가 남는다. 국가가 그 역할을 대신해 주지 않으면 여성이 능력을 펼치기 위해 가족들을 동원하거나, 시장에서 비싼 임금을 주고 도우미를 구해야 한다. 정부가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아이돌보미 사업은 한계가 있다. 대기자는 원하는 시기에 서비스를 받을 수 없어서 불편하고, 도우미는 좋지 않은 처우로 힘겨운 상황이 반복된다.

교육을 통한 지위 경쟁의 과열을 식히기 위한 노력도 시급하다. 지위 경쟁 역시 노동 시장의 이중 구조와 연관이 있는 장기 과제가 될 것이다. 지위 경쟁의 시작은 핵심적인 일자리가 적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청년의 일자리가 결혼과 임신, 자녀 출산의 물꼬를 터준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일자리의 확대를 위해서는 장시간 근로를 막는 것과 더불어 중급 숙련의 확보, 노동력 활용을 위한 국가 차원에서의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청년들이 중소기업 취업을 거부하게 만드는 노동 시장의 극심한 이중 구조가 완화돼야 한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자녀 교육을 통한 지위 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고학력 여성들의 이탈이 지속되면 국가가 아무리 아이와 함께 행복한 대한민국을 슬로건으로 내세운다 해도 출산율은 높아지지 않는다.

배울수록 노동 시장에서 배제되는 환경은 배움에 대한 의욕을 저하시킨다. 그러나 배우지 않으면 핵심 노동 시장에 진입하기가 불가능하다. 문제는 고학력 여성이 노동 시장에 진입조차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수많은 고등 교육 기관에서 고학력 여성이 쏟아지고 있다. 여성 청년의 일자리 문제는 우리 사회의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젊은 여성은 이미 부모나 선배 유자녀 여성이 노동 시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보고 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예 노동 시장에 진입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일하기 어려운 시대에 아이까지 낳아서 이중고를 치를 여성은 많지 않다.

청년 세대의 문제는 대학, 취업, 졸업으로 이어졌던 일반적인 생애 주기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이제는 경력 단절이라는 것조차 경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학업은 마쳤지만 취업이라는 관문을 뚫기 어렵고, 경제적 독립이 어려우니 결혼은 꿈꾸지 않는다. 결혼을 해도 주거 비용과 생활 유지 비용이 너무 커서 자녀 출산을 포기한다. 아이를 더 낳아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보다 아이를 더 낳을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사회가 변해야 할 것이다. 우선 보육과 교육 사이에서 사각 지대에 놓인 초등학교 시기의 돌봄 필요를 채워서 일하는 부모가 근심 없이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결혼과 임신, 출산과 양육은 일하려는 여성에게 여전히 심각한 약점이다. 결혼과 출산, 자녀 양육이 여성의 성장을 막는 사회 구조를 해소하는 일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미래가 달린 문제다.
 
[1]
최성은, 〈무엇이 한국의 고학력 여성의 노동 시장 참여를 어렵게 하는가?〉, 《페미니즘 연구》, 2017.
[2]
K. J. Morgan, 《Working Mothers and the Welfare State: Religion and the Politics of Work-family Policies in Western Europe and the United States》,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6.
[3]
신필균, 《복지 국가 스웨덴: 국민의 집으로 가는 길》, 후마니타스, 2011.
[4]
김영순, 〈노동조합과 코포라티즘, 그리고 여성 노동권〉, 《한국정치학회보》, 2004.
[5]
Lena Wängnerud, 〈Diminished Gender Differences in the Swedish Parliament〉, 《Annual Meeting of the Swedish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 2016.
[6]
김영순, 〈노동조합과 코포라티즘, 그리고 여성 노동권〉, 《한국정치학회보》, 2004.
[7]
Winton Higgins, 〈The Swedish Municipal Workers’ Union A Study in the New Political Unionism〉, 《Industrial Democracy》, 1996.
[8]
Victor Pestoff, Peter Strandbrink, 〈The Politics of Swedish Child Care〉, 《National Report》, Mid Sweden University,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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