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비야디
4화

비야디, 배터리 기업에서 전기차 기업으로 변신

인수 합병으로 자동차 시장에 뛰어들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비야디는 배터리로 시작해서 전자기기 제조 분야까지 사업을 확장해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왕촨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자동차 사업 진출을 선언한다. 이를 위해 비야디는 2003년 1월, 경쟁력 부족으로 도산 위기에 놓인 국영 기업 시안친촨자동차회사(西安秦川汽车有限责任公司)의 지분 77퍼센트를 2억 7000만 위안에 인수해 자동차 회사를 설립한다. 비야디가 그동안 배터리 사업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과 기업 공개를 통해서 마련한 자금 등이 동원됐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국영 기업 친촨자동차를 적지 않은 금액으로 인수해 간 비야디가 인상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추후 비야디가 국가적 차원의 자동차 정책의 주요 수혜자가 된 것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신의 한 수였지만 당시 여러 경영진, 주주 및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은 모두 반대했다. 비야디로서는 당시 자동차 산업에 처음 진출하는 격인데다가 인수한 곳 역시 경쟁력이 부족한 회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촨푸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그는 자동차 산업에 뛰어든 지 고작 5년이 되던 2008년에 이렇게 일갈했다. “2015년에 중국 1위, 2025년 글로벌 1위가 되겠다!”

이는 볼보(Volvo)의 모기업이자 다임러(Daimler)의 대주주로 유명한 지리자동차(吉利汽车)의 창업주인 리슈푸(李书福)가 처음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 때 “자동차 그까짓 거 그냥 바퀴 네 개랑 소파 하나 붙어 있는 거 아닌가?”라고 발언한 것만큼이나 업계를 놀라게 했다.

소년이여, 야망을 품으라고 했던가? 비야디는 2015년 중국 1위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2025년에는 중국 내 신에너지 차량 분야뿐 아니라 승용차 전체에서 1위를 달성하는 일이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중년의 나이에도 왕촨푸의 소년과 같은 야망은 현재 진행형이다.

왕촨푸는 배터리 전문가였지만 자동차 분야에서는 사실 문외한에 가까웠다. 비야디가 자동차 산업에 뛰어든 것은 순전히 그들의 배터리 기술과 자동차 산업의 결합에 따른 상승 작용을 노린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모두가 우려한 바와 같이 자동차 사업은 초기에 계속 적자만 냈고, 불행히도 그 적자 폭은 계속 커지고 있었다. 상승 작용은커녕 기존 비야디의 밥줄인 배터리, 스마트폰 부품 사업에서 벌어온 수익을 몽땅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버린 것이다.

비야디의 최초 목표는 배터리와 자동차를 결합한 전기차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주춧돌도 다지지 않고 3층짜리 멋진 기와집을 짓는 건 불가능했다.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망해 가는 회사의 주인이 정부에서 비야디로 바뀌었다고 안 팔리던 차가 갑자기 잘 팔릴 리 만무했다. 일단 인수한 자동차 회사를 최소한 정상 궤도로 올려놓고 꺼져 가는 호흡부터 살려 내는 게 급선무였다. 상황을 변화시킬 유일한 방법은 결국 괜찮은 신차를 개발해 잘 판매하는 것이었다.

비야디는 상기의정자동차(上汽仪征)의 총괄 엔지니어인 롄위보(廉玉波) 등 여러 유명 엔지니어 등을 스카우트 해오고 2억 위안 이상의 연구·개발비를 써가면서 ‘316’이라는 이름의 신차를 개발한다. 그런데 막상 최종적으로 개발된 차량 샘플의 디자인 수준은 매우 떨어졌다. 처음 차를 공개할 당시 업계의 많은 인사들을 초청했는데 실물을 보고 다들 차마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이미 많은 돈을 투자해 개발한 자동차였지만 왕촨푸는 결국 이 모델의 출시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비야디의 첫 차는 반드시 성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야디 자동차의 카피캣 시절


이렇게 자체 연구·개발을 통한 신차가 디자인부터 엉망인 상태로 개선 방안을 도저히 찾지 못하자 생사의 갈림길에 선 비야디는 결국 중국 기업 특유의 철면피 작전을 동원한다. 남의 모델 베껴오기 즉, 카피캣(copycat) 전략이다. 비야디의 카피 대상은 도요타의 베스트셀링 준중형 세단 코롤라(Corolla)였다.

비야디는 먼저 코롤라의 디자인부터 가져와 디자인에 맞게 차 설계를 하는 역방향 개발을 추진했다. 그 카피의 결과가 2005년 9월 탄생한 비야디의 첫 출시 모델인 F3다. 코롤라와 F3는 한눈에 보기에도 어떤 게 코롤라고 어떤 게 F3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유사했다. 헤드라이트, 즉 눈매 쪽만 살짝 변화를 준 것을 제외하곤 전체적인 모양이 매우 닮아 있다. 그렇다고 비야디가 아무 계획 없이 도요타의 디자인만 그대로 베껴 온 건 아니다. 비야디의 전략은 역시나 가성비였다. 비야디는 과거 배터리 생산할 때 반자동 생산 설비를 깔아본 경험을 토대로 자동차 생산 설비를 유사하게 설계했다. 이를 통해 코롤라의 기능 대부분을 똑같이 구현하면서도 생산 원가를 최대한 절감해 코롤라 가격의 60~70퍼센트에 F3를 출시했다.
비야디 F3 (사진: CARGUY)
도요타 코롤라 (사진: CARGUY)
과연 왕촨푸의 바람대로 비야디의 첫 차는 성공했을까? ‘혹시나’는 ‘역시나’로 이어졌다. 기업과 소비자는 부창부수의 관계라 했던가. 기업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도요타의 코롤라를 그대로 베껴 왔더니 중국 소비자도 같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역시 자동차는 갓성비”라 외치며 F3 출시를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비야디 F3는 출시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중국 자동차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내에 10만 대가 팔린 역대급 중국산 베스트셀링 카로 등극했다. 심지어 중국에서 비야디의 F3가 너무 잘 팔리자 오히려 도요타에서 다시 비야디의 F3를 분해해 어떻게 자사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차량을 제조하고 판매할 수 있었는지 연구했다는 흥미로운 후문도 전해진다. 도요타 입장에선 특허권을 들어 제소하더라도 중국 법원에서 승소할 가능성이 크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홍보해 주는 꼴이 되니 결국 표절 문제는 큰 시비 없이 지나가게 됐다.

정상적인 기업이라면 타사의 제품을 그것도 자사의 첫 차에 그대로 베껴 오는 건 양심이 허용하지 않을 문제다. 타사의 권익 침해를 불사하는 성공 만능주의로 비판할 지점도 당연히 있다. 하지만 이 시도가 지금의 비야디를 있게 했다는 점에서 초창기 비야디의 자세를 짚어 볼 여지는 있다. 이 정도의 카피는 법적으로는 크게 문제없을 것이라는 확신, 디자인은 베꼈을지언정 성능과 가격이 경쟁력 있다면 분명히 소비자의 마음을 열 수 있다는 자신감, 이에 대한 비난은 받아들이겠다는 열린 마음 등이 F3의 성공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신에너지 차량 기업으로의 변신


비야디는 F3라는 신차 하나로 단번에 중국 내 메이저 자동차 브랜드로 위상이 올라갔다. 내연 기관 차량의 성공은 왕촨푸로 하여금 이제 자동차에 배터리를 장착할 시기가 됐음을 직감케 했다. 만일 전기차를 제대로 만들 수 있다면 미국, 유럽 등의 자동차 선도 기업들이 내연 기관 차량의 핵심 부품에서 가지고 있는 기술 우위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비야디는 첫 모델인 F3의 성공과 각종 타 사업군에서 얻은 각종 영업 이익을 대부분 전기차 개발에 쏟아붓는다. 비야디는 F3 출시 이전인 2004년부터 비야디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라는 회사를 설립해 자동차 전장 분야를 진작부터 준비했고, 2005년에는 전기차 개발 전담 사업부를 설치해 이와 관련된 본격적인 개발 작업에 착수하며 전기차 개발의 초석을 다져 왔다. 갈아온 칼을 꺼낼 시기가 된 것이다.

비야디는 전기차 제조 로드맵에 따라 2008년 12월 세계 최초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자동차 모델인 F3DM을 출시하고 그 이후 순수 전기차까지 개발할 계획도 세워 간다. 세계 최초라는 의미는 컸지만 판매량은 극히 적었다. 출시 당시 F3DM의 가격은 15만 위안으로 F3의 약 두 배였고 당시는 신에너지 차량 관련 보조금 정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 내부 관계자와 많은 주주들 역시 왕촨푸의 전기차 집착을 이해하지 못했다. 휘발유가 이렇게나 저렴한데 도대체 전기차가 무슨 효용이 있냐는 회의적 의견뿐이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투자자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은 달랐다. 버핏은 2008년 F3DM 출시 전 왕촨푸가 그리는 전기차의 미래에 대해서 높게 평가하며 같은 해 9월 자신의 투자 지주 회사 버크셔해서웨이(Berkshire Hathaway Inc.·이하 ‘버크셔’)를 통해 18억 홍콩 달러로 비야디 지분 약 10퍼센트를 인수하기에 이른다. 버핏의 인수는 비야디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주목받은 건 비야디라는 개별 기업뿐만이 아니었다. 전설적인 투자의 귀재가 비야디에 큰 투자를 했다는 소식은 전기차 개발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을 함구케 했다. 비야디의 주식은 이후 급상승해 왕촨푸는 2009년 350억 위안의 주식 가치를 보유한 중국 최대 부호에 이름을 올린다.

막대한 부를 얻었지만 왕촨푸의 꿈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그는 계속 내연 기관 차량에서 얻은 이윤을 전기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기술 개발에 쏟아부었다. 문제는 이 때문에 내연 기관 모델의 연구·개발 자금 부족 현상이 발생했고 비야디의 내연 기관 차량에서 품질 문제도 발생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비야디는 품질 문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계속 자동차 생산 능력을 계속해 확장해 나갔다. 당연히 사업이 지속될 수 없는 구조였다.

2011년 비야디는 생산 능력을 대량으로 확충했음에도 불구하고 판매량이 늘어나지 않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 시기에 비야디는 영업 이익이 작년 동기 대비 무려 88퍼센트나 감소했다. 거기다 비야디 차량의 품질이 좋지 않다는 입소문이 파다해져 판매 대리상 네트워크도 감소하는 등 여러 문제가 생겼다. 상황이 점점 악화하자 왕촨푸는 2012년 직접 기자 회견을 열고 이 문제에 대해서 잘못을 인정하며 향후 2년간 차량 품질 개선, 판매 네트워크 개선 작업을 거쳤다. 이에 더해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 지원 확대가 맞물려 비야디는 다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코롤라에 대한 디자인 모방과 2010~2012년 사이에 불거진 비야디 차량의 품질 문제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이 비야디라는 브랜드는 한동안 저가격, 저품질, 저신뢰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마도 최종 목표인 전기차 개발을 위해 악착같이 돈을 벌고자 일련의 저품질 문제와 저가 브랜드 포지셔닝을 감수했다고 보인다. 이런 고육지책은 2013년부터 점차 빛을 보기 시작한다.

2013년에 비야디 총매출에서 3퍼센트던 신에너지 차량 판매 비중은 2014년 12.6퍼센트, 2015년 24.2퍼센트, 2016년 33.5퍼센트, 2017년 36.9퍼센트까지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호실적에 힘입어 비야디는 2015~2018년 4년간 전 세계에서 전기차를 가장 많이 판매한 기업이 됐다. 해당 기간 중 차종을 전기 승용차로만 놓고 봤을 때는 테슬라가 1위, 비야디가 2위다. 테슬라는 당시 승용차만 만들었던 반면 비야디는 승용차와 버스, 트럭 등을 포함한 상용차까지 모두 만들었기 때문이다.
비야디 당. 사진: 비야디
신에너지 차량에서 동력을 얻은 비야디는 저가, 저신뢰 등으로 낙인찍힌 이미지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을 시작한다. 2013년부터 친(秦), 당(唐), 송(宋) 등 중국 왕조 이름 시리즈로 전기차를 출시하고 2016년도부터는 아우디의 디자인 총괄 볼프강 에거(Wolfgang Egger) 등 해외에서 유명 디자이너를 스카우트해 디자인에 힘을 줬다. 내연 기관 자동차에서 보였던 전략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디자인과 성능에 대한 전폭적인 투자로 완성된 게 바로 2017년 6월 출시된 비야디의 신규 디자인 라인인 ‘드래곤 페이스(Dragon Face)’ 시리즈다. 모셔온 디자이너가 아우디 출신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아우디의 냄새가 물씬 풍기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디자인의 수준이 훨씬 올라갔다는 평가다.
비야디 송. 사진: 비야디

워런 버핏의 비야디 투자와 청산 과정


비야디의 자동차 산업 진출기를 보면 왕촨푸의 의지와 경영 감각이 빛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전기차 회사로서 비야디의 약진을 있게 한 워런 버핏의 무시무시한 영향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전 세계의 투자자를 놀라게 한 2008년의 투자는 2024년 지금, 비야디의 흥망성쇠를 롤러코스터 위에 올려놓은 사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실 이 투자에는 다양한 뒷얘기가 있다. 버핏이 인수하려던 비야디의 지분은 원래 25퍼센트였다고 한다. 왕촨푸 역시 처음 버핏의 25퍼센트 지분 투자 의향을 들었을 때 매우 흥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분의 25퍼센트는 다소 과도하다고 판단해 일단 10퍼센트까지만 투자받기로 했고 실제로는 9.9퍼센트의 지분만 버크셔가 매입한다. 지분을 최소한으로만 팔기를 원한 왕촨푸를 보며 버핏은 더욱 긍정적으로 비야디를 평가했다는 후문이다.

뒤늦게 알려진 사실이지만 버핏은 2008년 초만 하더라도 비야디에 대해서 전혀 인상이 없었다고 한다. 버크셔의 부회장 찰스 멍거(Charles Munger)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비야디와 창업자인 왕촨푸에 대해서 파악한 후 투자를 결정한 것이다. 멍거는 ‘찰리(Charlie)’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버핏의 오랜 사업 파트너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비슷한 시기에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자금 부족으로 버크셔의 투자를 받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멍거와 머스크가 같이 식사한 적이 있는데 예상외로 멍거는 테슬라의 전망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언급했다고 한다. 머스크가 건방지고 오만하다는 이유였다. 멍거는 결국 테슬라에는 투자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기차 시장 자체는 큰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투자처를 물색하다 중국의 비야디를 추천받게 된다. 이후 멍거는 창업자 왕촨푸가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과 제너럴일렉트릭의 전설적인 CEO 잭 웰치(Jack Welch)를 합쳐 놓은 것 같은 인물이라며 버핏을 설득해 비야디 지분을 매입한다. 여담이지만 당시 테슬라에 투자했다면 비야디에서 거둔 수십 배의 수익률은 우스울 뻔했다.
왼쪽부터 왕촨푸, 찰리 멍거, 워런 버핏 빌 게이츠. 왕촨푸 입이 귀에 걸렸다. 사진: 비야디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2022년 8월 24일 버크셔는 매입 후 단 한 주도 팔지 않고 갖고 있던 2억 2500만 주 중 133만 주를 매각한다. 비야디 주식은 2023년 기준 중국 본토의 선전증권거래소에 상장된 A주와 홍콩 상장 중국 기업인 H주로 나뉘어 있다. 버핏이 보유하고 있던 주식은 홍콩거래소의 H주다. 2008년부터 비야디 H주 지분의 19.9퍼센트를 보유하고 있던 버핏의 버크셔는 2023년 5월까지 10여 회에 걸친 지분 매각을 통해 9.87퍼센트까지 비중을 낮췄다.

지금까지 버핏의 투자 행태를 미뤄볼 때 그가 장기 보유 중이던 주식을 팔기 시작했다는 것은 해당 기업의 주식 전량을 청산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 시대 최고의 가치 투자자 중 한 명인 버핏이 주식을 팔기 시작했다면 비야디가 이제 정점을 찍었고 향후엔 별 볼 일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비야디가 아닌 다른 전기차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봐야 하는 것일까? 비야디와 현재 신에너지 시장에서 견줄 수 있는 건 오직 테슬라뿐이다. 혼란스러운 시장을 읽기 위해 세계적인 투자자의 투자 행보를 참고하는 것도 좋지만 두 기업의 펀더멘털을 자체적으로 분석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 현재 전기차 왕좌를 두고 격돌하는 비야디와 테슬라의 장단점을 다음 장에서 본격적으로 비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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