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1화

프롤로그; 감독 이전에 지망생이 있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색, 계〉, 〈브로크백 마운틴〉을 연출한 거장 감독 리안(李安)은 젊은 시절 영화 관련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6년을 전업주부로 지냈다. 이른바 영화감독 지망생 기간이었다. 미국의 영화감독 우디 앨런(Woody Allen)은 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긴 지망생 기간 동안의 멘탈 관리가 생명이라고 했다.[1] 그러나 대부분의 관객은 성공한 영화감독의 이야기에 주목할 뿐, 그들이 거쳐 간 지망생 과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영화 시장의 성장세에 대한 통계는 쏟아지지만, 영화감독 지망생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는 추산된 바 없다.

2017년 기준 국내 영화 관련 학과는 150곳 이상이다. 영상 관련 학과까지 포함하면 300곳이 넘는다. 생각보다 많은 수의 영화감독 지망생이 매년 배출되고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하지 않고 감독을 준비하는 학생들까지 고려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2017년 〈미장센 단편 영화제〉에는 1163편의 작품이 접수되었다. 적어도 수천 명이 지망생의 길을 걷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영화계에서는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통상 10년 정도의 지망생 기간을 거친다고 본다. 이 긴 시간 지망생들은 어떤 통계에도 잡히지 않은 채 각자도생하며 살아간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이들이 어떤 기관에서도 보호받기 힘든 존재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들은 일반적인 취업 준비생 혹은 예술가, 어느 쪽으로도 특정되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

어떤 면에서는 지망생들을 취업 준비생으로 여길 수 있다. 직업을 갖기 위한 준비 과정에 있고, 준비 과정의 경제적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하지만 지망생들은 자격시험이나 입사 시험을 거치는 취업 준비생에 비해 준비 기간이 압도적으로 길고, 그 과정이 끝나도 소속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특수하다. 지망생들이 꿈꾸는 직업인 감독 역시 예술가인 동시에 사업가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이자 연출가로서 예술 작품을 만들지만, 배급과 제작에 참여하면서 손익 분기점을 고민하는 사업가이기도 하다.

미디어 학계에서는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등 문화 산업 종사자들을 창의 노동자(creative labors)로 분류한다. 이들은 일반 노동자와 달리 개인의 창의성을 활용해 문화적,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다. 미디어 학자 데이비드 헤즈먼댈치(David Hesmondhalgh)와 사라 베이커(Sarah Baker)는 창의 노동을 문화 산업 내에서 상징 생산(symbol-making)[2] 과정에 집중하는 작업으로 정의한다. 문화 산업은 물리적 가치나 부가적 가치가 아닌, 오로지 상징 생산 과정만으로 이윤을 내는 유일한 분야다. 창의 노동자들은 후원에 의존했던 전통적 예술 노동자들과 달리, 자본을 가진 산업에 고용된 상태에서 임금을 받으며 일한다.

창의 노동자라는 개념은 생소하지만, 지망생들은 이 낯선 범주에서조차 논의 밖으로 밀려난다. 지망생들은 고용되어 임금을 받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산업의 특성상 고용되지 않은 상태에서 창의적인 일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시나리오 작업은 대부분 제작이 결정되기 전부터 진행된다. 그 결과 임금을 받지 못하는 지망생 신분에서 구상하고 개발한 시나리오가 문화 산업이 내는 이윤으로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지망생의 일을 창의 노동에 포함해서 살펴야 하는 이유다.

어쩌면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의 본질은 이 지난한 지망생 기간에 있다. 입봉, 즉 상업 영화로 데뷔하기 직전까지 지망생들은 이미 ‘노동 이전의 노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노동은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다. 열다섯 명의 영화감독 지망생들을 직접 만났다. 창작을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치고 있는지, 어떻게 지난한 과정을 이어 가는지 들었다.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창의 노동의 본질을 살피고자 했다.

지망생들의 노동 그리고 삶에 대한 이야기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비단 영화감독 지망생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 꿈꾸는 이 세상 모든 청년들의 이야기다. 이 글이 수많은 영화감독 지망생들을 포함해 모든 준비의 과정에 있는 이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불안한 창의 노동의 장에서 꿈을 키우고 있는 분들에게는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1]
로랑 티라르(조동섭 譯), 《거장의 노트를 훔치다》, 나비장책, 2007, 62쪽.
[2]
문화 산업은 상징 상품(symbolic goods)을 기반으로 한 경제 활동이 주요 기반이 되는 산업인데, 상징 상품이란 본질적 가치보다는 상품이 내재하고 있는 문화적 또는 상징적 가치(symbolic value)로부터 이윤을 주로 추구하는 상품이다. 상품에는 일반적으로 본질적 가치(intrinsic value), 부가적 가치(process added value) 등 여러 형태의 가치가 있지만 그중 상징적 가치는 즉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다. 상품의 디자인, 감성, 역사 등이 바로 그 예가 될 수 있다. 많은 상품이 상징적 가치를 지녔지만, 그중 문화 상품은 상징적 가치로만 이뤄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소비자들은 문화 상품을 소비할 때 물리적 기능은 거의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극장에 들어가면서 기대하는 가치 역시 영화를 보는 동안 얻게 되는 새롭고 즐거운 경험, 즉 영화 콘텐츠가 갖고 있는 상징적 가치다. 안채린, 《창의 노동: 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커뮤니케이션북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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