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2화

지망생 1인칭 주인공 시점

무엇도 담보되지 않는 직업


창의 산업(creative industries)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지고 있다. 한류 열풍과 함께 창의적 인재의 육성을 강조하면서, 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인력 개발에 주목하는 추세다. 그러나 새로운 수출 산업으로 기대를 받는 한국의 창의 산업, 그 이면에는 불안정성이 극대화된 창의 노동의 장이 존재한다.

영화감독이란 그 시작부터 예측하기 어려운 직업이다. 어떻게 해야 감독이 될 수 있는지 명확한 답을 찾기 어렵다. 영화는 작품 단위의 산업이어서 기본적으로 프로젝트형 고용이 이뤄진다. 프로젝트별로 고용이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감독이 되기까지는 운이 크게 작용한다. 입봉 후 미래도 다르지 않다. 고용 특성상 정년이 없지만, 동시에 젊은 나이에 일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작품의 흥망에 따라 다음 작품의 촬영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미래가 불투명하다. 작품이 성공하더라도 보장된 미래는 없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감독이라는 한 사람에게 굉장히 많은 역할을 부여한다.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과 연출 같은 창의적인 작업부터, 현장에서 협업을 이끌고 작품 제작을 관리·감독하는 리더의 역할, 대기업을 상대로 의견을 조율해 영화를 유통·배급하는 사업 영역까지 감당해야 한다. 수많은 역량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감독은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게 되고,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

감독은 실패의 위험 부담 역시 거의 혼자서 짊어져야 한다. 영화 산업은 기본적으로 고위험 고수익 산업이다. 영화에는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막대한 자본이 투입된다. 한국 신인 감독의 입봉 작품에는 적게는 3억 원, 많게는 35억 원 정도의 투자가 이뤄진다.[1] 상한선이 없기 때문에 자본의 투입량에도 한계가 없다. 영화는 감독에게 예술이기도 하면서, 손익 분기점을 넘기기 위해 관객을 동원해야 하는 상품이다.[2] 감독은 예술성과 상품성 사이에서 끊임없는 줄타기를 해야 한다.

영화 산업은 태생적으로 불안정성을 배태한다. 영화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가 자신의 작품만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015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영화인들 중 절반 이상이 생계유지를 위해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예술 활동의 연간 수입은 중앙값 800만 원, 평균값 1876만 원이었는데, 1년 동안 작품을 찍고 생계를 꾸리기에는 터무니없이 적다.

 

백수는 아닙니다만


“감독 지망생? 그러니까 백수 아니냐?” 창의 노동에 대한 편견은 지망생을 향한 폭력적인 시선을 만들어 왔다. 지망생들이 어떻게 불안정한 문화 산업 한복판에 뛰어들 수 있는 것인지, 어떤 힘으로 그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인지,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창의 노동에 대한 연구에서조차 그들은 순진한 예술가 혹은 구조에 희생당하는 개인으로 그려진다.[3]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창의 노동자들을 화려한 산업의 모습이 보여 주는 환상에 이끌려 착취당하는 무지한 이들로 묘사한다.[4]

외부의 시선으로는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지망생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험난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지망생들 본인이다. 창의 노동의 장이 불안정하다는 것도, 그 길이 가시밭길이라는 것도 그들에게는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이들은 영화를 포기한 수많은 동료들을 지켜봤음에도 언제 끝날지 모를 감독 지망생의 길로 묵묵히 걸어 들어간다. 그들의 선택과 역동성, 그리고 원동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방적인 해석을 멈추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약 한 달간 열다섯 명의 감독 지망생들을 만나 인터뷰를 실시했다. 인터뷰는 일대일 형태로, 두 시간씩 1~2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지망생들은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의 청년들이다. 학부 졸업 후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소속 없이 시나리오를 쓰고 있거나, 영화감독을 희망하지만 금전적인 문제로 임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간략한 소개는 다음과 같다.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소영(29세)과 신희(26세)는 카페 서빙, 외국어 과외, 빵집 캐셔 등 아르바이트와 영화 공부를 병행한다. 둘 다 영화과 학부를 졸업했다. 소영과는 인터뷰를 2회 했다. 첫 만남 때 그는 단편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고, 다음번 만남 때는 지원금으로 찍은 영화를 편집하고 있었다. 그는 대체로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있었다. 신희는 단편 영화제 수상 경력이 있는 감독이다. 만났을 당시에는 장편 시나리오 작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영화제에서는 ‘감독’으로 불리지만 아르바이트 현장에서는 ‘을’일 뿐인 자신의 정체성이 기묘하다고 생각한다.

지윤(31세)은 비영화과를 졸업한 탓에 처음에 영화판에 진입하는 데 높은 허들을 느꼈다. 영화인의 테두리에 들어가고 싶어 상업 연출부에 여러 번 지원했으나 진입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 전문 교육 기관을 졸업하고 웹 드라마 스크립터를 하면서 차근차근 인연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최근에는 영화 관련 기관에서 활동비를 지원받은 덕에 얼마간 생업 활동을 유예할 수 있게 되었다. 인터뷰 당시 활동비를 지원받는 기관에서 멘토링 활동을 하면서 단편 시나리오를 작업하고 있었다. 지윤은 작업을 제때 진행하여 영화제 단편 경쟁 부문에 출품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태식(29세), 현빈(30세), 현우(28세)는 장편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이들은 작업 중인 시나리오가 입봉작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다. 셋 모두 4년제 영화과 학부를 졸업했다. 태식은 종종 단기 연출부, 촬영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현빈과 현우의 경우 몇 개월은 상업 영화 연출부 생활을 하고, 몇 개월은 쉬면서 시나리오 작업에 집중하는 사이클을 반복한다. 셋 다 단기적으로는 연출부 일을 잠시 접어 두고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울(28세)은 영상 편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작품을 구상해 놓은 상태는 아니었다. 다만 하루에 몇 시간이라도 책상에 앉아 시나리오 아이디어를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상업 영화 연출부 경력과 영화제 경력을 두루 갖춘 그도 이제 곧 장편 시나리오에 도전해 볼 생각이다.

준성(27세)과 종환(32세)은 상업 영화 연출부로 일한다. 이 둘은 연출부 일을 감독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정으로 생각하는 지망생들이었다. 여러 상업 영화 현장을 거치면서 인물 조감독, 미술 조감독 일을 하고 있었다. 영화 관련 학과를 다니지 않은 둘에게 상업 영화 현장은 감독에게 직접 배우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준성은 지망생들 중 유일하게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상업 장편 시나리오를 작업하고 있었다. 종환은 곧 크랭크인[5] 할 상업 영화 시나리오를 감독과 함께 각색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윤아(29세)는 요즘 웹 드라마 제작에 집중하고 있다. 웹 드라마의 시나리오 작업과 연출을 모두 맡고 있어서 당장은 개인적인 영화 작업에 많은 시간을 내기 힘든 상태였다. 영화로 생계를 책임지기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웹 드라마 시장에서 커리어를 쌓을 생각이다. 자신이 만드는 영화가 꼭 상업 영화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망생들 중 유일하게 입봉과 상관없이 영화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4년제 영화과 학부와 영화 전문 교육 기관을 졸업했다.

주현(34세)도 윤아와 비슷한 이력을 가졌다. 영화 전문 교육 기관 경력으로 종종 대학 워크숍에 출강을 나가기도 했다. 지금은 장편 시나리오를 작업 중이다. 학부, 영화제, 영화 전문 교육 기관을 두루 거치면서 쌓은 영화계 인맥이 많다. 시나리오 작업만 잘 마친다면 입봉에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가끔 마음을 다잡기 힘든 순간도 있다고 토로했다. “영화는 이상이 아니다”라며 최대한 냉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였다.

윤진(27세)은 일반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입시 과외를 하며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석사 과정은 부모님의 반대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며 언젠가 자신의 플랜 B가 되어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제를 ‘요만큼의 햇살’[6]을 주는 존재라고 말한다. 당선만 되면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자신의 영화를 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햇살은 대학원 생활과 과외로 바쁜 와중에도 윤진이 영화를 포기하지 않게 만든다.

준호(31세)와 진우(30세)는 독립 장편 영화를 찍었다. 인터뷰 당시 영화 후반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었고 동시에 다음 작품으로 상업 장편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영화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는 일인 만큼 감정적, 정신적으로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준호와 진우는 작업 과정에서 자괴감, 불안감 등을 추스르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이들은 성실한 자세를 잃지 않아야 슬럼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수빈(32세)은 장편 시나리오로 투자를 받아 작업을 시작한 상태였다. 인터뷰 당시에는 투자사와 논의하면서 시나리오를 고치고 있었다. 이미 완성한 시나리오를 다시 고친다는 것은 고된 작업인 듯 보였다. 그는 며칠 단위로 슬럼프에 빠졌다가, 불현듯 헤어나 다시 글을 쓰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감독으로서 그의 가장 큰 꿈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것이다.

열다섯 명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각자도생하고 있는 지망생들의 삶이 점차 그려진다. 기존의 프레임에서 한 발짝 벗어나 지망생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들어가 보자.
[1]
3억 원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 과정 선정작에 투자되는 금액이며, 35억 원은 2013년에 개봉한 김병우 감독의 상업 영화 입봉작 〈더 테러 라이브〉의 예산이다.
[2]
감독들마다 이러한 특성을 받아들이는 지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예술의 비중이 높은 영화를 산업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기기도 하고, 산업의 비중이 높은 경우 흥행시켜야 하는 예술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3]
데이비드 헤즈먼댈치(김영한 譯), 《미디어 생산》, 커뮤니케이션북스, 2010, 151쪽.
[4]
Pierre Bourdieu, 《Méditations pascaliennes》, Paris: Seuil, 1997.
[5]
영화 촬영을 처음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크랭크라는 말은 영화 촬영기의 손잡이에서 유래된 용어로 촬영이라는 뜻으로 통용된다. 〈크랭크인〉, 《매일경제용어사전 -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6]
윤진: 〇〇이라는 친구가 있거든요. 인터넷에 치면 나와요. 신춘문예 당선된 애거든요. 소설. 아무튼 그랬는데 걔도 되게 비슷한 거예요. 걔도 돈도 없고, 소설가에 대한 꿈은 있고. 그거예요. 어쨌든 요만큼의 햇살은 주어진 거잖아요. 걔도 신춘문예 당선은 되고, 나도 영화제는 가고. 그니까 포기할 수는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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