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한 공군 중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사건을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심지어 공군은 한국 군대 내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개방적인 병영 문화로 알려져 있죠. 그럼에도 가해자인 상관 중사의 성추행을 묵인하고 은폐하려고 조직적인 시도까지 일어났습니다. 온 국민은 분노했고, 문재인 대통령도 해당 사건의 피해자를 추모하며 목이 멘 듯한 모습을 보였다고 하죠. 결국 지난 6월 4일에 이성용 참모총장이 사의를 표했고, 서욱 국방부장관은 “매우 송구하다”며 사과했습니다. 이번 청해부대 관련 사과로부터 겨우 한 달 반 전입니다.
이 사건은 비단 가해자 중사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사건 이전에도 최소 2건 이상의 별개의 성추행 사건이 있었다고 하며, 피해자의 신변보호조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성추행 사건 자체가 후배 부사관이 운전하는 차량의 뒷좌석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부대 내의 선임들은 가해자를 두둔하였죠. 가해자의 아버지는 피해자에게 합의를 종용하는 듯한 장문의 문자를 보내고, 피해자의 남자친구에게도 압박이 가해지는 등, 군 내부의 폐쇄성과 권위주의적인 체계가 만들어낸 안일하고 부적절한 대응의 총집합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부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군 내부의 문제점은 그 특유의 폐쇄성으로 인해 외부로 잘 공개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는 한국 군대의 현주소를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진 병영’. 우리 군대가 강조하는 이 개념은 2005년 ‘530 GP 사건’과 ‘논산 육군 훈련소 인분 사건’이 큰 계기로 작용하여 만들어진 용어입니다. 햇수로 벌써 16년차입니다. 우리 군의 지휘 계통은 왜 변화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우리나라의 국방부 장관은 군인 출신이 앉게 되는 임명직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문민정부가 들어선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죠. 휴전 국가인 우리나라 특성 상, 싸울 줄 아는 사람이 군대를 다뤄야 한다는 생각에 많은 분이 동의하실 겁니다. 일례로, 6.25 전쟁 당시 우리나라의 2대 국방부장관은 문민 출신이었는데, 6.25 전쟁 초기 대응에 크게 실패했죠. 그 이후로 군인 출신이 국방부 장관이 되는 것은 관례였습니다. 다만 이로 인해 우리 군은 문민 통제에서는 다소 멀어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뜩이나 정치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기관인데, 정치적 무관심까지 더해져, 군 지휘 계통 내의 문제점은 잘 사라지지 않습니다.
한국군은 사실 미국 군대의 권위주의적 모델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애초에 상명하복을 기본으로 하여, 명령을 즉각적으로,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군인을 기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것이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집니다. 민주적인 절차를 상당 부분 무시할 수밖에 없는 군 조직의 특수성은 군부 독재 시절의 잔재와 뒤섞여, 결국 군대 내 뿌리 뽑히지 않는 악습과 권위주의적인 명령 체계, 소통의 부재로 나타나게 됩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군에 대한 이런 식의 묘사는 언제나 의견이 분분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안타까운 사건들을 숱하게 목도하였고, 언론에 공개되지 않고 은폐되는 사건들도 많을 것입니다. 물론, 군의 보안과 기율이 효율적인 작전 수행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휴전 국가이고, 미중 패권 경쟁의 구도에서 지정학적으로 최전방이자 완충 지대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AI와 자율 무기가 투입되는 현대전의 기술력을 고려해 보았을 때, 우리 군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선진 병영의 개념이 2005년부터 대대로 홍보된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북한이 지속적인 대남 도발과 함께 남북 관계에 마찰을 일으키자, 선진 병영에 대한 목소리는 다소 수그러들기도 했습니다. 이는 ‘22 보병 사단 총기 난사 사건’과, ‘28 보병 사단 의무병 살인 사건’을 기점으로 군에서 다시 강조되다가 최근 ‘자가 격리 군 장병 부실 급식 사건’부터 성추행 피해 공군 부사관 사망 사건, 청해부대 사건까지 겹치며 단어의 진정성마저 의심 받는 상황입니다. 북한의 도발이 선진 병영의 목소리를 잠재웠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 합니다. 강한 군대와 선진 병영은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 관계일 수도 있는데 말이죠.
코로나 악재로 수많은 분야에서 리더십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곪아 있던 문제는 위기를 만나면 쉽게 터져 나오기도 합니다. 바로 청해부대처럼 말입니다. 한국은 아직 징병제인 만큼, 장병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그들이 국가와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는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것이 필요한데, 한국의 군 조직은 여전히 소통 부재와 권위주의적 리더십, 전근대적인 마인드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다양한 사건을 통해 실감하게 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수치화 가능한 재난 앞에서 청해부대 34진 문무대왕함이 받아든 성적표는 가히 암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버드대 국가 준비 리더십 이니셔티브를 이끄는 레너드 마커드는 《매일경제》인터뷰에서 코로나가 바꾼 리더십에 대해 언급하며,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위기 관리자(Crisis Manager)’가 아닌 위기 이후를 내다보고 폭넓게 대처하는 ‘위기 리더(Crisis Leader)’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현 글로벌 위기 상황에서 리더는 데이터를 따라야 한다고 하죠. 《이코노미 조선》의 칼럼에서는 위기 사태에서 “리더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소통의 중요성도 강조하죠.
물론 이는 코로나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리더에 대한 보편적인 제언입니다. 하지만 이번 청해부대의 대응을 돌이켜보면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최초로 의심 환자가 발생한 시점부터 사태 이후를 내다보지 못했던 지휘관, 신속 항원 검사 키트가 아닌 신속 항체 검사 키트만 보급한 국방부와 합참의 안일한 처사, 백신을 수급할 수 있었음에도 장기간 백신 미 접종 상태로 작전을 수행하게 한 지휘부. 만약 장병과 증상에 대해 확실히 소통하고, 대응 매뉴얼을 확실히 갖추었더라면, 데이터를 바탕으로 세밀하게 본부에 보고하고, 예방을 위해 본부에서도 적극적으로 청해부대를 지원하였다면, 이번과 같은 대참사로 이어지진 않았을 겁니다.
보수적인 군 조직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습니다. 이미 장기간 군 생활을 함께한 장성들로 이루어진 우리 군에는 새로운 인력이 충원되어야 하고, 이에 따라 유연한 리더십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유연하고 개방적인 것은 약하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더욱 선진화되고 효율적인 조직이 돼야 합니다. 그것이 대한민국 국민이 원하는 대한민국 군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