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8년에 있던 제주 예멘 난민 사태를 기억하실 겁니다. 엄청난 국민적 반대가 있었고, 반대 집회가 세 차례나 열리며, 정치권에서도 예멘 난민에게 난민 지위 혹은 인도적 체류 허가를 내준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방송에 나와 예멘 난민에 대한 지지를 요청한 배우 정우성씨는 숱한 댓글로 ‘예멘 난민은 정우성 씨 집에나 들여라’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예멘 난민에 대한 우려가 크던 이유는 지금의 논란과 같습니다. 그들의 종교가 이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자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 정부의 재건 사업에 도움을 준 경우가 아니었다면, 이번 이송 작전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들어온 아프간인에 대한 처우 문제와, 우리와 아직은 접점이 없지만 나중에 발생할 수도 있는 난민 수용에 대한 문제에 대해 우리 사회는 언제나처럼 ‘이슬람의 위험성’을 이유 삼아 마음의 벽부터 세울 것입니다. 흔히 얘기하는 ‘타자화’는 적어도 대상에 대한 이해가 수반된 경우를 의미하지만,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이해부터 거부한다면 판데믹 이후 국제적인 반중정서로 인해 한국인이 이유 없이 아시아 혐오 범죄의 타겟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난민 지위를 얻느냐 마느냐 이전에 난민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난민은 본국으로 돌아갈 시 커다란 정치적 박해나 구금, 신변과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너희 나라의 운명은 너희가 결정해라’라는 말은 엄청난 폭력인 셈입니다. 한국인들이 유독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에는 우리가 실제로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에서 시작하여 군부독재를 이겨내고 민주화를 직접 이루어 성공적인 민주국가로 탄생한 배경이 자리합니다.
하지만 모든 나라가 같은 조건일 수 없고, 같은 조건이라 해도 늘 성공할 순 없습니다. 우리는 분단과 전쟁을 겪었지만 적어도 같은 민족 정체성을 유지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내전이 일반화된 중동 지역은, 상술했듯 비단 이슬람 종교의 특성뿐 아니라 서구열강에 의해 갖은 민족 분열이 일어나며 처음부터 다민족 국가로 구성된 경우가 많습니다. 국민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상태가 애초에 아니죠. 앞선 주장은 중국이 서방의 경계를 받는 각종 독재 국가를 옹호하며 내세우는 논리와 같습니다.
중동의 부족주의가 우리나라 탓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국을 지키지 못했다는 무조건적 비판이나, 무슬림이라는 편견 속에서만 사고하는 것은 지양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 정부를 도와 아프간 재건에 힘썼던 아프간인들의 장기 체류마저 거부할 정도로 우리에게 여유가 없는 것일까요?
자국 보호주의로 포장된 인종주의
한국에 협력한 아프간인들의 입국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를 도운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 도의적 책임을 다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또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의미에는 국제 관계의 무게가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더 큰 국가로, 더 큰 국제 레짐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동맹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어야 하고, 헌법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가치를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국민적 반대가 있는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이슬람 문화는 문화 상대주의로 쉽게 수긍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율법 가치는 국제법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죠. 탈레반이 실제로는 아프간에서 탄압을 자행하면서도 국제적으로 유한 이미지를 제고하려 했던 이유는 그들 역시 엄청난 간극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문화권의 이주자들이 범죄율이 높다거나 그들의 종교적 특성이 한국의 문화와 큰 차이를 보인다는 두려움 역시 근거 없이 탄생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양혜우 연구원의 <누가 혐오를 생산하는가? - 인종적 위계의 하층에 배치된 외국인들>이라는 논문에서는 한국에서 외국인 혐오가 발생한 원인에 대해 노동 이주 정책의 미흡함을 꼽기도 했습니다. 인종적 위계가 노동 시장과 가족 구조 내에 구조화되었고, 신고, 단속, 추방의 억압적 국가 권력이 작동한 결과 인종주의와 혐오가 싹트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문화 혐오에 대한 근거로 주장되는 것들이, 혹시라도 필요에 따라 노동 이주로 받아들인 약소국 외국인들에 대한 방치와 억압적 제재의 산물은 아닐지 고민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난민의 입국을 반대하는 청원에는 우리나라 경제가 여유롭지 않다는 것, 아프간인들은 자국 보호를 위한 의지가 없었다는 것, 타국도 난민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 테러의 위협이 있다는 것 등이 적혀 있습니다. 다소 과격한 청원이지만 한편으로는 난민 수용 반대 여론을 잘 응축한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돌아갈 곳 없는 난민이라도 수용국의 여론과 국민적 합의 없이는 결국 상술한 보트피플처럼 될 것이 자명하므로 모든 의견은 존중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자국민이 먼저라는 의견을 피력할 때, 우리는 아프간보다 훨씬 잘살고 있진 않은지, 자국 보호와 재건에 힘쓴 아프간인이 정말 없는지, 난민을 받지 않겠다는 타국이 결국은 우리가 닮고 싶은 선진국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지, 무슬림 전체를 테러리스트로 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자국 보호주의 이면에 우리 사회는 약소국의 국민들에 대한 내밀한 인종주의를 숨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