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범위, 처우개선
간호법은 간호사의 업무 범위와 처우개선 등을 담은 법안이다. 현행 의료법이 규정하는 간호사의 업무는 ‘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진료의 보조’다. 이번에 직회부된 간호법 제정안의 1조는 현행 의료법의 업무 범위를 “의료기관과 지역 사회”로 규정한다. 이외에도 간호 종합 계획을 5년마다 수립, 3년마다 실태 조사 실시, 적정 간호사 확보 및 배치의 의무, 처우개선에 대한 기본 지침 제정 및 재원 확보 방안 마련 등의 내용이 담겼다.
체계 붕괴와 이기주의 사이
의료연대 등의 의사 단체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부분은 ‘지역 사회’다. 해당 표현이 간호사의 업무 범위를 의료기관 바깥으로 확장했다는 지적이다. 현행 의료법 제33조는 의료인은 의료기관 바깥에서 의료업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의사 단체들은 간호법이 간호사의 단독 개원 가능성까지 열어둔 것이라는 우려를 표하고 있다. 간호법을 필두로 모든 직역의 개별법이 난립해 현행 보건 의료 체계가 붕괴할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각 직역에 대한 분리가 업무 범위 충돌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간호조무사 등의 타 직역도 간호사만을 위한 단독 법안 제정에 반발하고 있다. 논점은 간호법 내부에 갇히지 않는다. 특정 직역의 권리를 규정하는 법안은 직역 이기주의이며, 이는 결국 모든 직역 간의 갈등을 초래할 것이라는 담론으로 이어진다.
간호법, 동상이몽
법안에 대해 제기되는 우려와 당위성은 극명히 갈린다. 대한간호협회는 간호법이 고령화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필수라고 주장한다. 치료를 넘어 지역 사회에서 치매 등의 만성 질환을 관리하고, 이를 감당할 수 있는 통합 돌봄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논지다. 논란이 되는 간호사의 업무 범위는 의사의 처방하에 진행된다는 점에서 현행 의료법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각각이 내세우는
근거도 갈린다. 간호협회는 OECD 33개국이 간호법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의협은 OECD 회원국 중 독립적인 간호법을 가진 국가가 11개국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의협의 기준은 다른 의료법과 완전히 분리됐는지의 여부였고, 간협의 기준은 간호사의 업무와 책임을 독립적으로 규율하고 있는지였다. 숫자 하나에도 각자의 기준이 다르다.
부족한 간호사
간호법에서 논란이 되는 내용인 업무 범위 규정과 처우개선은 간호계에 산재한 내부 문제와도 멀지 않다. 한국 종합병원에서 간호사 한 명은 16.3명의 환자를 담당한다. 일반 병원은 43.6명에 달한다. OECD 평균이 6~8명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치다. 최근 세브란스병원은 의료계 최초로
주4일제 시범 사업에 착수했다. 고질적인 간호사 인력난이 그 이유였다. 열악한 업무 환경, 삶과 병행하기 어려운 업무 강도 등이 그 이유로 꼽힌다. 간호사의 평균 근무 연수는 7년 5개월 수준이다. 이는 숙련 간호사의 품귀 현상으로도 드러난다. 부족한 간호사가 환자를 위협하는 이유다.
부족한 의사
환자를 위협하는 것은 사라지는 간호사만이 아니다. 의사 인력난, 필수의료 기피 등도 심각한 문제다. 현재 간호법과 함께 논란의 여지가 일고 있는 ‘의사 면허 취소법’은 의사가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으면 면허를 취소하는 내용이 담긴 개정안이다. 의사 단체는 의사 면허 취소법이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필수의료 분야 종사자들의 소극적인 진료로 이어질 것이며, 결국 필수의료 기피 현상으로 이어질 것이라 주장한다. 부족한 의사는 불법 행위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PA간호사는 진료 보조 인력으로 전공의 업무 일부를 처리한다. 문제는 국내 PA간호사의 존재 자체가 의료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부족한 의사, 모호한 간호사의 업무 등이 회색지대가 된 PA간호사의 존재 이유다. 최근 삼성서울병원은 PA간호사의 채용 공고를 냈다가 병원장이
의료법 위반으로 고발되기도 했다.
미온적인 행정부, 독선적인 입법부
더불어민주당이 9개월간 법사위에 계류하던 간호법을 국회에 직회부하며 본격적인 갈등이 가시화했다. 간호법 제정안이 국회에 발의된 이후 갈등은 계속됐으나 보건복지부는 미온적이었다. 지난 2월 9일,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조금 더 협의해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을 뿐, 행정부 차원에서 간호법을 설명하거나 여론을 수용하는 시도는 없었다. 행정부와 달리, 입법부는 독선적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은 ‘노란봉투법’, ‘양곡관리법’ 등의 쟁점화된 법안들을 본회의에 직회부하거나 그럴 뜻을 밝혔다. 정부와 여당은 직회부 된 법안에 대해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지난 2월 10일, 국민의힘 소속 법사위 위원들은 간호법 등 법안의 직회부 결정에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를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조용히 무너지는 병원
간호법을 둘러싸고 입법부의 의견이 나뉘면서 의사와 간호사의 파업은 예견된 사태가 됐다. 필수의료의 공백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출범한 의정 협의체도 간호법을 둘러싼 논란으로 인해 파행을 겪고 있다. 주요 쟁점이었던 비대면 진료에 대한 논의도 이어지지 못하는 상황이다. 의료계 내부의 상황은 심각하다. 보건복지부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전국의 분만 산부인과는 584곳으로, 전년 대비 87곳
감소했다. 수도권 바깥은 더 심각하다. 전국 226개 시군구의 30퍼센트에 해당하는 68곳에는 분만 산부인과가 단 한 곳도 없다.
충북 괴산군은 긴급 환자를 수용할 부인과가 없어 임산부 전담 구급대 서비스를 운영한다. 수도권의 공공 병원과 지방 병원에는 인턴 지원 미달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 의료 체계는 약한 곳부터 조용히,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직역 내 갈등, 정치계의 움직임이 몇 가지 논리에 갇힌 채 소란스러운 것과 대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