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디자인 시대
9화

정서 침술 ; 도시에 애정이 깃들 때

내가 살아가는 도심 곳곳에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작은 요소들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 삶의 질은 향상된다. 정서 침술이란 시민들에게 예술적 감응을 선사함으로써 도시에 활력을 주고 시민들의 자존감을 고양시키는 공공디자인이다. 시민의 필요(needs)를 충족시킨다기보단 다른 공동체의 관심과 부러움을 받는 디자인에 가깝다. 성공적인 마케팅 슬로건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지난 2004년, 영어 ‘I’와 ‘amsterdam’을 합해 ‘아이 앰 스테르담(I amsterdam)’이라는 슬로건을 만들었고 이를 거대한 글씨 조각으로 만들어 뮤지엄 광장(Museumplein)에 설치했다. 유머러스한 글씨가 생동감 넘치는 붉은색과 흰색으로 표현된 이 조형물은 무려 높이 2미터, 길이 26미터에 달한다. 즉시 암스테르담 도시의 상징이 된 것은 물론, 수많은 관광객들은 암스테르담을 방문할 때마다 이 조형물 앞에서 인증샷을 찍어 소셜 미디어에 올린다.[1] 이후 세계 각지의 도시들이 이 슬로건을 레퍼런스로 삼았고, 우리나라 서울의 I·SEOUL·U 또한 그 중 하나로 추정된다.
 


아이덴티티 디자인


포르투갈 제2의 도시 포르투(Porto)는 20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그 장구한 역사를 거쳐 현 포르투시에는 수많은 다양성이 공존하게 됐다. 이를 하나로 묶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인식한 포르투시는 지난 2014년 포르투의 본질을 보여 줄 수 있는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만들었다. 청색의 다양한 아이콘들을 조합할 수 있는 디자인이었다.

포르투 어딜 가나 눈에 띄이는 아줄레주(Azulejo)는 청색 도자기 타일로 이뤄진 포르투 전통 건축 양식이다. 주석 유약을 사용해 그림을 그려 만든 작품으로, 아줄레주의 맑은 청색은 5세기 넘게 생산되어 오며 자연스럽게 포르투시의 시그니처 컬러가 됐다. 포르투시의 리브랜딩을 의뢰받은 화이트 스튜디오(White Studio)는 이 아줄레주와 접목시킨 흥미로운 도시 아이덴티티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우선 시민들에게 각자 포르투를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What is your Porto?” 포르투를 관통하는 강물, 루이 1세 다리, 트램, 등대, 음악당, 주택, 와인까지 시민들은 다양한 오브제를 말했고, 이들 중 22개를 선정해 각자 작은 아줄레주 타일 한 장 한 장에 새겨 아이콘화했다. 이 아이콘들을 자유롭게 조합해 성벽, 길거리 입간판, 지하철 열차 표면 등 다양한 곳에 활용했다. 각기 다른 조합이지만 간단한 직선과 짙은 푸른색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이 문양이 있는 곳 어디든 포르투시를 관통하는 통일감을 느낄 수 있다.[2]
Porto Identity Design ⓒOnly Graphic Design
포르투의 플렉시블 아이덴티티 디자인(flexible identity design)은 공개되자마자 시민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많은 시민들이 도시의 상징이 될 수 있는 오브제에 대한 아이디어를 추가로 제출했고, 결국 아이콘은 22개에서 70개로 늘었다. 상점들은 70개의 아이콘들 중 각자의 매장에 적합한 아이콘들을 모아 간판으로 활용한다. 이처럼 도시의 스토리와 개성이 담겨 시민이 공감하기 쉬운 아이덴티티를 만든 덕에, 포르투 시민들은 일상생활에서도 이 아이콘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포르투의 아이덴티티는 그 자체로 시민들이 적극적 참여한 정서 침술이다.

프랑스의 보르도시의 ‘보르도(Bordeaux)’는 ‘물 가까이’라는 뜻으로, 와인 양조장을 뜻하는 샤토(château)가 무려 7000개가 넘는다. 보르도 구도심 증권 거래소와 관세청 사이에는 18세기에 만들어진 유럽 최초의 열린 광장, 부르스 광장(Place de la Bourse)이 위치해 있고 이 부르스 광장과 가론(Garonne)강 사이에는 직사각형의 넓은 물거울(Miroir d’Eau)이 있다.
Miroir d’eau ⓒSteve Le Clech Photos
1995년 알랭 쥐페(Alain Juppé) 보르도 시장은 강가 부두에 6킬로미터 산책로를 조성하는 등, 가론 강가를 활성화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999년 디자인 공모를 통해 선정된 것 중 하나가 바로 물거울이다. 2006년 완공된 물거울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반사 분수로, 완공까지 2년이나 걸렸다. 3450제곱미터 면적의 검은 화강암 바닥에 2센티미터 높이의 물이 채워지면 광장과 주변 건물, 푸른 반사되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펼쳐진다.[3] 이 바닥에선 15분 동안 물이 차오르다가 멈추고, 23분마다 짙은 안개가 분출되어 3분간 지속된다. 유아들은 얕은 물속을 기어 다니고, 어린이들은 자욱한 안갯속을 뛰놀며, 어른들은 신발을 벗고 짧은 산책을 즐긴다. 심지어 반려견들도 사람과 함께 뛰며 물안개를 즐긴다. 그러다 안개가 걷히면 하늘과 눈부신 구름이 물 표면에 완벽히 반사되어 방향 감각을 상실하기도 한다. 현실 세계를 넘어서는 마법과 같은 공간이 되고, 사람들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기 바쁘다. 밤이 되면 광장 주변 금빛 건물들에 조명이 밝혀지며 바닥, 그러니까 물거울 위로 데칼코마니가 생기며 초현실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물거울은 보르도 시민이 자랑스러워하는 동시에 전 세계 공공디자인의 방향성에 큰 영향을 미친 정서 침술이다. 지난 2007년 이 물거울은 유네스코 현대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Miroir d’eau ⓒTeddy Verneuil


퍼포먼스 건축


영국 런던 패딩턴 유역(Paddington Basin)엔 동서로 500미터가 이어진 길다란 운하가 있어 리틀 베니스(Little Venice)라고도 불린다. 전성기에는 운하를 통해 무역의 중심지로도 성장했으나, 현재는 상권과 오피스를 중심으로 한 비즈니스 유역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며 이곳은 도시 개발의 중심이 됐다. 재개발 과정에서 보행자가 통행할 수 있는 도개교가 새롭게 두 곳 탄생했다. 바로 굴렁다리와 부채다리다.
런던 굴렁다리 ⓒHeatherwick Studio
굴렁다리(Rolling Bridge)는 2002년 헤더윅 스튜디오(Heatherwick Studio)가, 부채다리(Fan Bridge)는 2014년 나이트 설계사무소(Knight Architects)가 디자인했다. 두 다리는 평상시엔 통행로로 기능하지만 배가 지나다닐 땐 예술적인 조각 작품이 된다. 굴렁다리는 강철 섹션 여덟 개로 이뤄진 12미터 길이의 다리로, 유압 펌프를 이용해 펼쳐졌다 움츠러들었다 할 수 있다. 다리가 접혀서 말려 올라가면 굴렁쇠 모양의 원형 조각으로 변신해, 그 모양 때문에 ‘고슴도치’ 혹은 ‘전갈의 꼬리’라 불리기도 한다. 부채다리는 부챗살 모양으로 펼쳐진다 해서 부채다리다. 2016년 영화 〈제이슨 본〉에도 등장한 멋진 다리로, 폭은 3미터, 길이는 20미터에 달한다. 다섯 개의 부챗살 모양으로 다리가 완전히 펼쳐지면 그 모양이 가위손과 유사하다고 해서 ‘가위손 다리’라는 별명도 있다.
런던 부채다리 ⓒMerchant Square Paddington
굴렁다리와 부채다리가 조성된 배경엔 중요한 목적이 있다. 공예와 기술이 결합해 조각 작품 같은 다리들을 조성함으로써 패딩턴 지역 시민들에게 활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두 다리는 패딩턴을 처음 방문하는 관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뿐 아니라, 그곳을 매일같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도 즐거움을 선사한다. 현재 두 다리는 스케줄에 따라 모양을 바꿔, 배가 지나가지 않는 시간에는 다리가 작품으로 변신하는 장면을 감상할 수 있다.
 


기능에 미감을 더하다


네덜란드 할스테렌(Halsteren)에는 도시와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17세기 만들어진 해자[4]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다 2010년, 사이클링과 하이킹 등 레크리에이션을 원하는 주민들을 위해 이곳에 다리를 추가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모세의 다리 ⓒRO&AD
디자인을 맡은 RO&AD 건축 사무소는 본래부터 다리가 없던 곳에 다리가 생기면 해자의 미관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경관을 유지하고자 멀리서는 보이지 않는 다리를 구상했다. 물길 사이에 놓인 이 다리는 마치 모세의 기적과 닮아 모세의 다리(Moses Bridge)라고도 불린다. 다리의 입구가 되는 성벽과 사람이 건너는 길다란 통로는 전쟁의 참호처럼 감춰져 있다. 완전한 방수 목재로 만든 다리는 도랑처럼 물속에 놓여 풍경 속으로 사라진다. 수면보다 낮은 높이로 만든 이 건축물은 언뜻 보면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이라는 걸 알아채기 힘들다.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모세의 길 속에 있는 듯한 경험을 하고, 물과 자연을 비슷한 눈높이에서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수면의 높이는 펌프를 통해 너무 얕지도 혹은 옆으로 넘치지도 않게 유지된다. 자연을 그대로 활용한 이 정서적 침술은 2012년 런던 디자인 박물관에서 올해의 디자인으로 선정됐다.

생활의 편의가 아닌 시민의 예술적 감응을 충족시키는 다리 디자인은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대구 율하아트라운지(Yulha Art Lounge)는 2018년 대구국제공항에 인접한 율하천 고가 아래 공간에 붙여진 새 이름이다. 이 지역은 공항 근처인 탓에 고도 제한으로 발전이 더디고, 건물이 낙후돼 주민이 쉴 곳이나 산책할 곳이 거의 없었다. 이에 대구시는 이음파트너스에 리브랜딩을 의뢰했고, 이음파트너스는 율하천 고가 아래 각각 성격이 다른 두 개의 라운지를 만들었다.
율하놀이터 ⓒYiEUM Partners
하나는 율하놀이터(Yulha Play Zone)로, 하천을 따라 250미터 길이로 형성된 좁지만 긴 공간이다. 시민들이 이동 중에 잠시 머무를 수 있는 휴식 및 놀이 공간을 마련했다. 율하천 물길의 풍경, 주변 마을의 골목길, 장난감들을 모티브로 선과 면을 분할해 만든 그래픽은 바닥, 벽, 천장 등을 장식하며 착시 효과와 더불어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다른 하나는 율하예술터(Yulha Stage)라는 초승달 형태의 공간으로, 20개의 원형 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전체 길이 170미터, 면적 2450제곱미터에 달한다. 율하예술터엔 각종 전시, 소규모 공연, 플리마켓 등 다양한 문화 경험을 할 수 있는 감성 공간이 마련돼 있다. 문화 행사가 돋보일 수 있도록 비정형의 네온 컬러 조명을 사용했고, 추상적인 아트 페인팅과 금속 조형물로 연출해 공간 자체가 작품이 되도록 했다. 예술적 정서 침술을 통해 버려진 공간이 밝고 역동적인 힐링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율하아트라운지는 지난 2019년 경험적 그래픽 디자인 어워드인 SEGD Global Design Awards에서 공공 설치 부분의 최고상인 Honor Award를 수상했다.
[1]
김민정, 〈[도시 브랜딩] 암스테르담 Amsterdam〉, 《월간디자인》, 2016.9.
[2]
김연수, 〈진짜 도시 브랜딩을 잘하면 이렇게 한다.〉, 2017.3.17.
[3]
Carrie Whitney, 〈Bordeaux's Water Mirror Is Magical, Worth isiting〉, HowStuffWorks.com., 2019.7.18.
[4]
해자(垓字·垓子)란 동물이나 외부인, 특히 외적으로부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성(城)의 주위를 파서 경계로 삼은 구덩이를 말한다. 방어의 효과를 더욱 높이기 위해 해자에 물을 채워 넣어 못으로 만든 경우가 많았다. 외호(外濠)라고 부르기도 한다. 위키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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