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젊은이가 대학을 싫어하는 이유

4월 5일, explained

미국 대학은 최악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이념 전쟁터가 됐다. 한국도 유사한 미래를 앞두고 있다.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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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 저널이 미국 성인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56퍼센트가 4년제 대학 진학이 나쁜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대학 진학 회의론은 18세에서 34세 젊은 층에서 가장 강했고, 여성과 노인에게서 두드러지게 높아졌다. 대학을 믿는 65세 이상 응답자는 2017년 56퍼센트에서 44퍼센트로, 여성은 54퍼센트에서 44퍼센트로 떨어졌다.

WHY NOW

미국의 젊은 세대는 대학을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이념적 주장이 오가는 전쟁터이자 낭비라고 판단한다. 대학의 실패이자 지성의 좌절이다. 불신의 주된 이유에는 경제적 논리가 자리한다. 비싼 등록금이 보장하지 못하는 미래, 현실과는 먼 대학의 가르침이 그 핵에 위치한다. 지금 대학 수업은 실용적이지 않다. 올바름에 대한 판단을 가르치는 교양 수업은 공감되지 않는 성가신 대상이다. 한국 대학도 유사한 위기를 앞두고 있다. 이 위기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대학은 그 존재 의의를 잃을지 모른다.

엘리트주의와 좌익 정치의 요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증가하던 미국의 대학 회의론은 팬데믹 시기 급물살을 타게 된다. 지난 10년간 미국의 대학 진학률은 15퍼센트 감소했다. 회의 여론의 중심에서도 아직 대학을 믿는 자들의 형상은 뚜렷하다. 민주당원, 대학 학위를 이미 가진 사람, 연간 10만 달러 이상을 버는 사람. 대학이 엘리트만을 위한 폐쇄적 공간이자, 좌익 정치의 요람이 됐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5200만 원의 대학 졸업장

미국인의 평균 학자금 대출 잔액은 4만 달러다. 한 명의 학생이 4년간 대학을 다니기 위해 짊어져야 하는 돈이 5200만 원을 넘어간다. 학부생의 30퍼센트는 연방정부에서 학자금을 빌리고, 13퍼센트는 은행과 같은 민간 기업에서 학자금을 빌린다. 사채로 학자금을 빌린 학생의 2퍼센트는 채무불이행 상태가 된다. 재학 중 필요한 생활비는 신용카드와 주택 담보 대출이 감당한다. 미국 성인의 20퍼센트는 학부생 시절 빌린 부채가 미납된 상태다. 한 해에 교육비로 4만 달러를 지출할 수 없는 대졸자들은 사회에 던져질 때부터 이미 ‘채무자’다.

5200만 원의 기회비용

채무자가 되면서까지 대학생이 돼야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계층 이동을 위해 학위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2008년은 이 공식에 균열을 낸다. 금융위기에 대응하며 연방과 주 정부는 고등교육 자금을 대폭 삭감했다. 학교는 등록금을 인상했고, 개인의 빚도 늘었다. 계층 이동을 위해 자녀의 대학 진학을 택했던 이들은 주택 자금, 저축 비용을 희생했다. 자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매달 100달러가 넘는 상환금을 갚는다. 부모의 노후 자금은 이미 다 자녀의 대학 졸업장에 녹았다.

백지장이 된 졸업장

지금 대학의 위기는 대학 진학이 계층 이동을 보장했던 과거의 공식이 무너지는 데서 기인한다. 대학은 더 밝은 미래, 더 나은 직장, 더 높은 소득을 보장하지 못한다. 양질의 일자리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대학 졸업생만이 아닌, 수많은 경력자와 겨뤄야 한다. 평직원에서 고위 관리로 이동하는 것은 평생직장이 사어가 된 시대에서 꿈꾸기 어려운 미래다. 대학에서 배우는 대학 졸업이 바로 직업 현장에 투입될 지식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음악학 석사 학위를 갖고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것보다 용접을 배워 용접공으로 일하는 것이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한다.

경제적 재화, 교육과 지성

기회 사다리로서의 대학은 이미 폐허가 됐다. 대학 진학을 결심하는 것과 졸업 자체가 특권이 된 상황에서 대학이 엘리트의, 엘리트를 위한, 엘리트에 의한 것이라는 판단은 논리적인 귀결이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2011년 월가 점령 시위 이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생들은 교육이 경제적인 재화로 다뤄진다는 것에 분노했다. 학생들은 교육은 그 자체로 가치라고 주장했지만, 이런 논리는 급진적이라 여겨졌다.” 현대의 대학은 재화다. 교육은 특권이다. 지성은 불필요하다. 민주당원은 이 여론을 따라가지 못하고, 공화당원은 그를 이념적 근거로 이용한다.

좌파 이데올로기 세뇌의 기지

공화당원에게 대학 교수의 교육은 학생들을 진보적, 좌파적 이데올로기를 세뇌하는 도구다. 텍사스의 주지사 댄 패트릭(Dan Patrick)은 “종신 교수는 ‘학문의 자유’라는 문구 뒤에 숨어서 미래 세대의 마음을 독살하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플로리다의 드샌티스(DeSantis)는 직접 공립대학인 플로리다 뉴 칼리지의 이사회를 점검하고, 수업에서 비판적 인종 이론과 젠더 이데올로기를 교육하지 못하게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1월, 비판적 인종 이론과 성별 이데올로기 등을 가르치는 학교는 연방 기금을 삭감해야 한다는 요의 교육 개혁을 제안했다. 이들에게 있어 대학에서 이뤄지는 페미니즘 교육, 어퍼머티브 액션은 계층 간 갈등을 부추기는 사회악이다.

가진 것들의 배부른 소리

공화당원의 과격한 주장이 힘을 얻는 이유는 간단하다. 민주당의 의제가 사라졌고, 대학이 수행했던 본래 기능이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대학 교육은 계층 사다리를 보장하지도, 사회 공통의 문제의식을 설정할 수도 없다. 공화당을 지지하는 젊은 층, 나아가 대학에 진학할 여유가 없는 젊은이에게 대학 교육은 ‘가진 이들을 위한 배부른 소리’다. 인종 차별이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라는 진단이나, 페미니즘의 사상적 전통은 4만 달러의 값을 주고 듣고 싶은 지식이 아니다. 지금의 대학 교육 방법론은 미래를 위한 토론 논제를 설정해야 한다는 의무조차 책임감 있게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IT MATTERS

현재 정치적 올바름과 다양성의 논리에 대항하는 가장 큰 적은 공정과 실용이라는 손에 잡히는 가치다. ‘나사(NASA)’는 냉전 시기보다 다양한 우주를 위해 달에 여성과 흑인을 보내지만, 제프 베이조스와 ‘스페이스X’는 그렇지 않다. 전자는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좇지만, 후자는 공정과 실용이라는 기준을 따른다. 대학이 미국의 젊은 세대에게 외면받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들이 지지하는 공정이라는 최신의 가치와 경제적이라는 기준에 대학이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미국의 대학 불신은 신기한 사례처럼 보이지만, 한국과 마냥 먼 이야기는 아니다. 대학이 좋은 직업을 보장하지도 못하고 실용적이지 않은 고담준론만 오가는 공간이라면, 한국의 대학도 존재 가치를 쉽게 잃을 수 있다. 교육도 소비자의 변화에 맞춰야 한다. 《왜 이대남은 동네북이 되었나》의 저자 이선옥은 지금의 페미니즘 담론을 비롯한 PC주의 논의가 불공정하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응하지 못할 때, 올바름의 기준을 말하는 교육은 목적지의 반절을 잃는다.

기회가 수축하는 시대다. 자신을 노블리스라고 생각하는 젊은이가 사라진다는 말이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PC주의도 경제적인 논리, 공정이라는 가치를 새로운 무기로 삼을 수 있다. 약자를 위해 자리를 내줘야 한다는 착한 이야기를 넘어 다양한 이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이 왜 좋은지를 설득해야 한다. 다양한 출신의 사람을 직원으로 모은다면 더 많은 소비자를 위한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외국인을 편견 없이 받아들인다면 노동력 부족을 해결할 수 있다. 직장에 출산 경력이 있는 여성이 는다면 모두가 당당히 육아휴직을 외칠 수 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여성 사이즈의 우주복이 탄생한 건 그런 ‘경제적인’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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