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정치를 하지 않는다

6월 19일, explained

거부권 정국이다. 대통령에게 절충이 없다. 여당이 없다. 정치가 없다.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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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파업으로 생긴 손해에 책임을 물을 때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한 정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배상액을 정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야당이 추진하는 노란봉투법의 핵심 조항이 담긴 판결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입법 정당성이 확인됐다며 노란봉투법을 6월 임시 국회에서 강행 처리할 방침이다. 그런데 이 법은 시작도 전에 폐기될 운명이다. 대통령 거부권 때문이다.

WHY NOW

거부권 정국이다. 야당은 쟁점 법안을 단독 처리하고,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로 맞선다. 노란봉투법에 이어 방송법, 화물자동차법, 학자금 무이자 대출법에도 거부권이 행사될 가능성이 크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미 양곡관리법 개정안과 간호법 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대통령과 야당의 극한 대립은 내년 총선 전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7년 만의 거부권

4월 4일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를 통과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전형적인 포퓰리즘 법안”이라며 국회에 재의를 요구했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이후 7년 만의 대통령 거부권이었다. 5월 16일에는 간호법 제정안에 재의를 요구했다. 두 법안 모두 국회로 돌아와 재의결을 거쳤고 결국 폐기됐다. 의회 과반을 차지한 야당의 법안 단독 처리 → 국회 통과 →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 국회 재의결 → 법안 폐기가 반복되고 있다.

헌법상 권한

대통령은 국회가 통과시킨 법률안의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 이를 거부권이라고 한다.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 입법부를 견제하기 위해 마련된 헌법상 권한이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법률안은 국회로 돌아간다. 재적 의원 과반수가 출석하고,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해야 의결된다. 재적 의원 299명 중 여당 의원이 115명이다. 3분의 1이 넘는다. 야당이 여당 협력 없이 재의결로 법안을 통과시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거부권 정치

거부권은 행사와 위협으로 구분할 수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거부권 정국은 29회 발생했고, 그중 18회가 실제 거부권 행사로 이어졌다. 나머지 11회는 거부권을 행사할 의사를 밝혔지만 실제로는 행사하지 않은 위협이었다. 국회 심의 과정에서 거부권 행사를 시사해 정책 양보를 유도하거나, 의회가 아닌 여론을 움직이기 위해 사용된다. 즉 전직 대통령들은 정치 역학을 바꾸는 도구로 거부권을 사용했다. 윤 대통령은 다르다.

절충이 없다

검사가 기소한 사건의 무죄 선고율은 1퍼센트가 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검사가 기소하면 유죄가 된다. 결국 검사가 하는 일에는 오류가 없게 된다. 대통령은 아직도 검찰 시절의 ‘무오류의 신화’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윤 대통령의 업무 스타일은 좋게 말하면 뚝심이 있고 나쁘게 말하면 고집이 세다. 여소야대 상황에서는 장점이 되기 어렵다. 앞선 두 번의 거부권 행사 때도 야당은 법안 내용을 절충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지만, 대통령은 응하지 않았다.

여당이 없다

모든 검사는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상명하복하며 유기적 조직체로 활동한다. ‘검사 동일체의 원칙’이다. 대통령은 여당에도 이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당과 정부가 하나라는 ‘당정일체론’이다. 대통령은 ‘1호 당원’으로서 국민의힘 당 대표 선거에도 영향을 미쳤다. 내키지 않는 지지율 1위 후보를 둘이나 날렸다. 여당이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이 모든 걸 정하고 여당은 따라간다. 여당의 정치 공간이 없다. 야당은 이런 여당을 협상 파트너로 여기지 않는다.

정치가 없다

거부권은 고도의 정치 행위다. 거부권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도구다. 거부권 행사와 위협을 통해 정치 역학을 바꾸는 것이다. 대통령은 양곡관리법과 간호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이후에야 거부권 행사 의사를 직접 밝혔다. 야당의 정책 양보를 유도할 수 없는 시점이었다. 대통령은 거부권으로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법률적 판단만을 내리고 있다. 헌법상 권리이니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정치가 떠난 자리를 법원과 검찰이 메꾸고 있다.

18 → 13 → 15

2008년 1월 이명박 정부 출범을 한 달 앞두고 차기 정부는 18부 4처를 13부 2처로 줄이는 정부조직법 개편안을 추진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자 회견을 열고 현 정부의 국정 가치를 깎아내리는 법안이라며 반발한다. 국회 심의 전에 거부권을 언급한 이유를 기자가 묻자 이렇게 답한다. “거부권 행사를 사전에 예고해 국회 심의에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정치 아니겠습니까.” 이후 여야는 절충을 찾아 15부 2처의 정부를 꾸리기로 합의한다.

IT MATTERS

임기 중에 거부권을 몇 차례 행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치 회복의 사례로 든 노무현 대통령도 거부권을 4회 행사했다. 진짜 문제는 대통령이 거부권을 정치 행위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1년이 지나도록 야당 대표나 원내대표와 회담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이다. 지금은 여소야대 국면이다. 의회의 주도권이 야당에 있다. 야당과 대화하지 않고는 국정을 이끌 수 없다. 거부권 카드를 꺼내기 전에 야당 대표부터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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