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제약의 우주, 혁신일까 도피일까

2023년 8월 24일, explained

보령으로 탈바꿈한 보령제약이 우주 사업에 손을 댄다. 느린 혁신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함이다.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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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우주 기업 ‘액시엄 스페이스(Axiom Space)’가 시리즈C를 마감했다. 3억 5000만 달러의 자금을 조달했다. 주요 투자자는 보령제약으로 잘 알려진 한국의 헬스 케어 회사 ‘보령’이었다. 보령 김정균 대표는 이번 투자를 놓고 “액시엄 스페이스와 비전과 정신을 공유하며 함께 기회를 구축할 수 있어 기쁘다”며 소회를 전했다.

WHY NOW

제약계의 혁신은 느리다. 느린 혁신의 리스크를 감당하기 위해 제약계는 오너 경영이라는 전략을 택해 왔다. 오너 3세의 시대가 도착한 지금, 김정균 대표는 새로운 보령의 미래를 꿈꾼다. 그 중심에는 우주가 있다. 김 대표에게 우주는 새로운 기회의 공간을 넘어서 제약계의 리스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다.

보령제약

시작은 한 약국이었다. 1957년, 창업자 김승호 회장은 종로 한복판에 보령약국을 개업한다. 1963년 제약 회사로 확장한 보령제약의 주요 전략은 한약재였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고유의 한약재를 신뢰하는 문화가 강했다. 보령제약의 주력 상품인 진해거담제 ‘용각산’의 주성분은 행인, 길경, 감초다. 전통에 충실하기. 이는 제약업계 전반이 공유하는 특성이기도 하다. 제약계는 보수적이다. 생명 존중, 공익성이라는 이념적 이유뿐 아니라 비즈니스적으로도 보수적인 문화가 유리하다. 신약을 개발하는 데 짧게는 10년, 길게는 15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시기에 맞춰 경영 스타일을 변화시키며 혁신을 추구하기보다는 안정적으로 기존의 움직임을 유지하는 편이 유리하다. 현재 대부분의 제약 기업이 택하고 있는 오너 경영 체제도 그 때문이다.

김정균

그런 보령제약에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건 2022년이었다. 새로 취임한 오너 3세 김정균 대표는 보령제약의 사명을 ‘보령’으로 변경한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글로벌 시장과 헬스케어 산업 전반으로 성장과 투자 기회를 확장”한다는 취지였다. 김정균 대표의 경영이 본격화하며 성적과 무관하게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주된 이유는 김정균 대표가 집중하는 우주 사업 투자였다. 주주들은 770억 원 넘게 투자된 우주 산업이 제약 회사라는 본질을 흐릴까 두려워했다. 지난 2023년 3월, 김 대표는 우주 산업이 회사의 장기적 성장을 위해 필요한 선택이라며 주주를 향한 공개적 설득에 나섰다.

우주 제약

이번 액시엄 스페이스를 향한 투자도 그런 김 대표의 신념 아래 단행된 투자였다. 제약에서 우주는 큰 가능성을 가진 기회의 공간이다. 우주에는 중력이 없다. 약물을 만들 때 단백질 결정이 가라앉지 않아 균질한 고순도의 약물을 획득할 수 있다. 덕분에 신약 개발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다. 뉴스페이스 시대는 소비자 풀도 확장한다. 중력이 없는 우주에 장기간 체류하면 근력이 약해지고 골밀도가 줄어든다. 액시엄 스페이스는 우주에서 인간이 사는 미래를 위해 우주 인프라를 건설하는 기업이다. 그 야망이 현실이 된다면 김 대표가 말하는 미래 먹거리인 우주 헬스 케어도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다.

오너 3세

2020년대 이후 경영 일선에 나선 오너 3세는 이전 세대와 달리 해외에서 신약 개발, 마케팅 등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경우가 많다. 이들은 해외 시장 진출의 필요성과 연구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신약 개발 파이프라인은 2018년 573개에서 2022년 1882개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한국 신약 개발의 미래는 밝지 않다. 시장에서 신약 개발은 적자를 보는 사업이다. 임상을 진행할 때는 50~150억 원 정도가 소요되지만, 시험 성공률은 9.6퍼센트에 불과하다. 투자가 위축된 상황도 신약 개발을 가로막는 원인 중 하나다. 코로나19 이후 바이오 시장은 VC를 비롯한 투자자들에게 외면받기 시작했다. 신약 개발 가능성이 불확실하고, 정부 규제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이유에서였다. 2021년 제약계의 평균 공모 금액은 1596억 원이었지만 2023년도는 149억 원에 지나지 않는다. 오너 3세의 야망은 크지만, 현실은 작다.

카나브와 제네릭

현실이 쪼그라든 배경에는 캐시카우가 소멸한 상황도 자리한다. 2010년 보령제약이 개발한 고혈압 치료제 카나브는 2022년 4분기 기준 매출 비중의 36퍼센트를 차지한다. 매출을 떠받치던 카나브의 특허는 2023년 2월 만료됐다. 카나브로 대표되던 고혈압·고지혈증 부문의 매출은 감소 추세다. 한국 제약업계의 통상적 생존 방식인 제네릭(복제약) 판매도 불확실한 상황이다. 정부는 2020년 7월, 제네릭 차등 보상 제도를 시행하면서 제네릭 약가 제도를 변경했다. 개발을 위한 시간과 비용 투자 등의 노력 여부에 따라 보상 체계를 다르게 적용하는 법안이다. 신약 개발 동력을 확보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법안이지만 제약계의 자금 주머니는 쪼그라든다.

LBA

김 대표는 국내 제약업계가 자체 개발로 성장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렇게 보령의 미래 먹거리는 우주가 됐다. 우주 사업 투자 비용은 M&A에서 확보 중이다. 보령은 LBA(Legacy Brands Acquisition)전략을 통해 특허가 만료된 해외 제약사 의약품의 생산, 판매, 허가 특허까지 모든 권한을 사들이고 있다. 일종의 M&A다. 기존의 브랜드 로열티를 통해 일정 수준의 매출 규모와 시장 점유율을 유지할 수 있다. LBA 전략은 빠르게 성과를 거뒀다. LBA를 통해 중추신경계(CNS) 치료제를 도입한 보령은 2022년 CNS 사업 부문 성장률 124퍼센트를 달성했다. 김 대표는 국내 제약업계가 성장하려면 “국내외에서 M&A를 통해 사세를 불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밝혔다. 반면, 백신과 신약을 개발하는 계열사인 보령바이오파마는 매각 중이다. 보령바이오파마는 국가필수예방접종 품목을 가장 많이 보유한 국내 3위 백신 기업이다. 알짜 자회사의 매각은 미래 보령의 성장 동력이 바뀌었음을 말한다.

리브랜딩

보령의 혁신은 더 이상 백신과 신약 개발이 아니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보령의 사명 변경을 두고 “제약 사업이 보령의 한 사업 부문으로 지위가 한 단계 내려앉은 것”이라 표현했다. 김 대표의 야망은 제약을 위해 우주를 활용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제약 사업과는 별도로 우주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꾸준히 밝혀 왔다. 우주는 브랜딩 차원에서도 유리한 선택이다. 우주 개발은 진취적인 개척자의 이미지를 갖는다. 조지타운대학교의 한 연구는 우주 사업이 브랜딩 전략이라고 지적하며 뉴스페이스는 기업가의 장기적인 야망, 스타트업 문화와 같은 수사법을 갖고 있다고 썼다. 보령제약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이지만 보령은 아니다. 우주는 오너 3세의 확장을 향한 열망이자 새로운 브랜딩을 위한 전략이다. 이제 보령에게 제약은 자금 조달을 위한 수단에 가까워졌다.

IT MATTERS

우주 사업 투자는 보령의 혁신일까? 분명한 것은 보령의 미래가 보령이 아닌 액시엄 스페이스를 비롯한 뉴스페이스 회사에 지워져 있다는 지점이다. 보령은 액시엄 스페이스와 달리 우주에 인프라를 건설할 수 없고, 블루오리진과 달리 우주에 비행사를 보낼 수 없다. 보령의 도전은 외부에 맡겨져 있다. 기존의 제약 회사가 제네릭에 매달려 왔듯, 보령은 뉴스페이스라는 새로운 시대에 모든 걸 걸고 있다.

신기술은 S형 곡선을 그리며 발전한다. 이전 기술이 수명을 다하면 새로운 기술이 출현하는데, 새로운 S 곡선이 자리 잡기 이전까지는 이행기를 인내하는 구간이 필요하다. 이 인내 구간을 거쳐 노보노디스크는 ‘위고비’를, 모더나는 mRNA 백신을 개발했다. 보령의 신사업은 더 나은 제약을 위한 인내 구간을 뒤로한다. 그런 점에서 보령이 말하는 혁신은 간편한 선택처럼 읽힌다. 빠른 선택이 지난한 실패를 이기는 일은 혁신보다는 베팅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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