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과 뉴라이트 정권

2023년 9월 4일, explained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장군 흉상이 철거된다. 정부는 무얼 감추려 역사 전쟁을 걸었나.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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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가 교내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최종 결정했다. 홍 장군의 소련 공산당 가입 이력 및 자유시 참변 가담 의혹을 문제 삼았다. 한덕수 총리는 8월 31일 국회에서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의 함명 변경을 고려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국가보훈부는 앞서 홍 장군에게 건국훈장이 중복 추서됐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홍 장군의 심정을 담은 시가 유행처럼 퍼지고 유해 봉환 당시 영상이 회자되고 있다. 평론가들은 국방부가 총대를 멨지만 대체로 정부가 역사 전쟁을 선포했다는 분석이다.

WHY NOW

육사의 논지는 홍 장군에 대한 주류 학계의 분석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흉상 철수에 대한 국방부 대변인의 기자 회견은 국방 전문 기자들에 의해 현장에서 이미 파훼 됐다. 주목해야 할 건 이념 논쟁으로 불거질 수 있는 역사 문제가 아무런 치밀함 없이 발표된 이유다. 과거보다 미래를 중시했던 윤석열 정부는 왜 모순을 보일까? 언론은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 주요 인사의 발언을 미루어 뉴라이트 사관을 문제 삼는다. 반쪽짜리 해석이다. 해외 사례로 보던 극우 정권의 탄생보다 경계할 것이 숨어 있다.

홍범도

여천(汝千)홍범도 장군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조직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이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주역으로 을미의병부터 20년 넘게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일본이 만주로 초토화 작전을 펴며 진군하자 시베리아로 쫓겼고 극동공화국의 요구에 무장 해제 후 훗날 소련이 되는 볼셰비키 적(赤)군에 합류한다. 자유시 참변 가담은 낭설로 참변 이후 독립군의 군사 재판에 재판 위원으로 참석한 일이 있다. 소련 입국 신고서에 그는 입국 희망 사유로 ‘고려 독립’이라고 적었다. 북한 정권은 수립되기도 전, 레닌 공산당 시절의 일이다. 당시 만주는 친일과 항일의 격전지였고 독립군들은 활동지에 따라 중국이나 소련과 함께 움직였다. #뉴라이트의시각

징후들

흉상 하나를 치우는 일에 온 나라가 들썩이는 이유는 이 결정이 빙산의 일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빙산의 실체를 보려면 다음 세 명에 주목해야 한다. 국가보훈부의 박민식 장관, 김영호 통일부장관,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이다. 박민식 장관은 지난 7월 친일 행적이 있는 6·25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의 국립묘지 기록에서 ‘친일’ 문구를 삭제했다. 공과를 따져 불완전하게나마 이룬 사회적 합의를 파기한 것이다. 김영호 장관은 극우 유튜버 출신이다. 그간 대한민국 정부가 계승해 온 통일 방안을 부정하며 ‘반일종족주의’를 비판한다. 김광동 위원장은 6·25 전쟁 당시 국가 폭력의 희생자에 대한 보상이 부적절하다고 말한다. 과거 논문에선 ‘5.18 북한 개입설’을 주장했다.

정체성

완성된 퍼즐은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드러낸다. 대한민국은 광복 이후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1948년부터 시작됐다. ‘공산 전체주의’와 싸워온 역사를 지녔다. 국군의 출발도 궤를 같이한다. 정부가 수립된 8월 15일은 ‘건국절’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점령했던 시기는 사회진화론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 근대화의 발판이었다. 임시 정부나 독립군의 의의는 조선 시대처럼 과거에 머문다. 친일을 문제 삼는 건 부적절하다. 공산주의와 함께 싸우며 ‘자유 민주주의’를 함께 수호하는 미국과 일본은 핵심 파트너다. 공산 세력과 맞서 싸울 간부를 양성하는 육사에는 맥아더, 백선엽 장군의 흉상이 더 적절하다. 궁금증은 이런 반헌법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이유로 향한다.

파시즘

개인적 신념 때문일까? 윤석열 대통령은 공식 석상에서 연일 ‘이념’을 강조하고 있다. 이 경향은 집권 1년 차부터 개각과 동시에 두드러졌다. 변상욱 전 CBS 대기자는 일련의 독립운동사 지우기를 파시즘에 비유한다. 파시즘 집권기 이탈리아는 좌우 관계없이 이탈리아 독립에 기여한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고자 만든 동상을 끌어 내린 바 있다. 다만 핵심은 파시즘 여부가 아니다.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은 뒤늦게 이념을 받아들인 ‘늦깎이’로 본다. 그의 말대로면 정반대의 신념이 깃들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이 경우 전 세계적인 극우 정당의 득세와도 구별된다. 민생을 겨냥하는 포퓰리즘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우클릭은 더 퇴행적인 셈이다.

집토끼

비단 개인의 신념이라면 의회와 시민 사회가 독주를 막으면 될 일이다. 한편 이 같은 행보가 총선 전략일 가능성은 없을까? 평론가들과 여당 일각에서도 “중원을 버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면 민성기 SBS 논설위원은 ‘반국가 세력과의 전쟁’을 총선 프레임으로 본다. 보통 중도층을 넓히는 게 전통적 선거 전략이나 진영 대결이 극심한 상황 속에선 집토끼의 결집을 다진 후 산토끼 사냥에 나서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이다. 뉴라이트 사관은 그 실체가 드러나기 전 이명박 정부의 집권을 도왔다. 국제 정세가 혼란한 시점에 ‘자유’를 강조하는 것은 일부 중도층에 호소력이 있을 수 있다. 국정 수행 지지도도 30퍼센트대를 유지하고 있다.

총장님

윤 대통령이 이념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의 캐릭터에서 찾을 수 있다. 정치엔 분명한 것이 없다. 다양한 사회 집단과 생각을 포용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게 정치의 역할이다. 반면 법은 분명하다. 형사법엔 유죄와 무죄, 형량이 있고 민법과 상법은 질서와 안녕을 위해 사회 구성원들의 수많은 행위를 빼곡히 규정한다. 정계 경험 없이 그간 검찰총장으로 살아온 윤 대통령에겐 법을 대체할 분명한 기준이 필요하다. 특히 형법에 잘 어울리는 것이 매카시즘, 파시즘적 사고다. 이념을 강조하며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원고와 피고, 리걸 마인드를 각각 지지자와 반국가 세력·카르텔, 자유로 치환한 결과다. 뉴라이트 사관은 검찰 정치가 겪는 기준의 갈증을 해소했을 것이다.

도구화

특정 이념을 가진 것보다 친숙했던 법의 부재를 이념에서 찾은 게 위험한 이유는 그다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념을 강조하면서도 이념에 걸맞은 구체적 정책이 부재한 것이 근거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보수가 이제껏 “이념보다 실용을 강조해 왔다”며 이제는 이념이 실용보다 앞서야 한다고 발언했다. 추구하는 실용이 없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는 얼마든 실용적으로 풀 수 있었다. 100퍼센트 안전하다는 전 세계 과학자들의 합의와 증명이 있어도 국내 여론과 국회 비준을 들어 협상력을 갖추고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는 게 정석이다. 실용을 모르면 불가한 일이다. 과학과 역사를 도구화하면서까지 얻으려는 이익이 보이지 않는다.

IT MATTERS

국가는 대검찰청이 아니다. 유기체다. 법익보다 유기적인 국익이 존재하고 사법부의 판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 대한민국은 그간의 역사와 시민 사회의 노력으로 도시 재생처럼 자리한 사회적 합의가 무너지고 법과 같은 확고한 이념의 잣대를 토대로 재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재개발의 마침표는 분양이다. 더 많은 주택 공급이라는 실용이 있다. 윤석열 정부의 이념 강조는 분양이 아닌 재개발 수행, 거기까지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이익인지 불이익인지보다는 주권 국가의 옳은 결정인지 아닌지가 더 중요하다. 한미일 관계 강화로 얻을 득실보다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 민생과 경제안보에서의 실익을 다투는 수 싸움보다 대한민국이 자유 민주주의인지, 공산 전체주의인지가 더 중요하다.

정권은 특정 역사 인식을 강요할 수 없다. 이는 시민 사회의 몫이다.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불완전하게 봉합된 탓에 정권마다 역사 논쟁이 필연적이만 시민 사회는 그 역할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역사 논쟁이 아니라 검찰 정치의 부작용과 무능의 신호다. 역사 재평가와 달리 경제 불황과 세수 결손은 누적된다. 한 번 맺은 외교 관계는 쉽게 번복이 어렵다. 떨어지는 출생률로 인한 인구 공백은 영구적이다. 역사 전쟁에 말려들면 다시 실용을 놓친다. 진화위 1기 상임위원을 지낸 사회학자 김동춘은 《결정적 순간》에서 역사적 사건이 도구화되는 세태를 들어 이념 논쟁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나 이것이 정책 논쟁으로 가야 하며 조그마한 사회 문제나 정책 이슈에도 역사적 사건이 동원되고 이념 논쟁의 딱지가 붙는 게 문제라 일갈한다.

홍범도 장군은 예순이 다 되어가던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생활고로 입당하고 스탈린의 1937년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카자흐스탄 크절오르다로 옮겨져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광복을 보지 못하고 운명한 홍 장군은 남겨진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현지의 반발에도 그의 유해 봉환을 무리하게 추진한 것에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 말하는 임시 정부의 전통을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이 계승했다는 의미가 있다. 홍 장군을 기리게 된 건 정파적 선택이 아닌, 대한민국의 소중한 특권임을 자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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