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문화 전쟁의 종군 기자

2023년 9월 5일, explained

기후 문화 전쟁이 시작됐다. 전쟁의 향방은 미디어에 달렸다.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NOW THIS

“칸 시장은 물러나라!” 8월 29일 영국 런던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통행료 때문이다. 이날부터 노후 공해 차량은 런던에 진입할 때 약 2만 원을 내야 한다. 야당인 노동당 소속 사디크 칸 런던시장이 대기 오염을 줄이기 위해 내린 결정이다. 당장 새 차를 살 돈이 없는 런던 외곽 거주 저소득층이 반발했다. 집권당인 보수당 소속 리시 수낵 총리도 운전자의 편에 서겠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WHY NOW

최근 런던의 시위는 몇만 원짜리 통행료 이슈에 그치지 않는다. 갈등의 기저에는 문화 전쟁(culture war)이 있다. 탄소 중립은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새로운 기준이 됐다. 좌파는 강력한 기후 변화 대책을 요구하고, 우파는 정책 속도를 늦추거나 거부한다. 영국뿐만 아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기후 문제는 문화 전쟁의 전선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구의 운명을 가를 이 전쟁의 향방은 미디어에 달렸다.

Climate Culture War

보수당이 집권한 영국에선 녹색 정책 축소가 검토되고 있다. 탄소 중립이 경제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다. 미국도 상황은 비슷하다. 내년 대선에서 공화당이 집권하면 바이든 정부의 친환경 정책이 뒤집힐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유럽 일부 국가와 미국에서 기후 문제는 더는 과학이 아니다. 지구 온난화의 과학을 수용하는 것은 낙태나 동성혼, 총기 규제처럼 개인의 정체성과 세계관을 반영하는 일로 여겨진다. ‘기후 문화 전쟁’이 시작됐다.

과학 지식보다 정치 성향

국제 과학 기구들은 온실가스 축적으로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고 국지적 기상 패턴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세계적인 과학 저널에 게재된 연구 논문들도 이러한 과학적 평가를 뒷받침한다. 즉 기후 변화에 대한 과학적 합의는 분명하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는 없다. 정치 성향에 따라 생각이 다르다. “지구 온난화의 주요 원인이 인간의 활동이냐”는 질문에 미국 민주당 지지자는 88퍼센트가 그렇다고 답했다. 공화당 지지자는 37퍼센트에 그쳤다.

2027년 한국

한국도 기후 문화 전쟁의 안전지대는 아니다. 탈원전과 후쿠시마 오염수 공방이 대표적이다. 2027년 대선에선 기후 문제가 주요 이슈로 부상할 수 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과학과 정치를 분리할 수 있을까. 과학은 통계적 확률을 제시한다. “지구 온난화는 온실가스 배출 증가의 영향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연구 결론은 절대적 확실성을 갖지 않는다. 연관성은 있지만 인과 관계를 증명하기 어렵다. 담배가 그랬다. 흡연과 암 역시 통계적 확률은 있어도 인과 관계를 입증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과 관계를 받아들인다.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언론의 역할

기후 회의론자들이 기후 위기가 과장됐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과학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이념적 필터로 과학을 보기 때문이다. 자연 과학이 할 수 없는 일을 사회 과학이 할 수 있다. 여기에 언론의 역할이 있다. 문화적 인식 차이를 좁히는 사회적 합의는 공론장에서 이뤄지고, 공론장은 언론이 만든다. 그럼, 지금 우리 언론은 기후 변화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좋은 기사를 생산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계절성 이슈

정치, 경제, 사회 중심의 뉴스룸에 기후 뉴스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좋은 기사를 가져와도 지면이 꽉 차서 다음 날로 밀리는 경우가 많다. 한국 언론에서 기후 기사는 계절성 이슈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폭염과 폭우가 잦은 여름, 폭설과 한파가 잦은 겨울에 피해 규모 위주로 보도된다. 스토리텔링 없는 현상 보도가 주를 이룬다. 사람은 숫자보다 이야기로 세상을 이해한다. 내러티브가 없으니 잘 읽히지 않는다.

북극곰의 문제

공포심과 죄책감을 자극하는 기사도 많다. 미국 어느 사막에서 사상 최고 온도를 기록했다거나, 세기말이면 지구 기온이 몇 도까지 오를 수 있다거나, 빙하가 녹아서 북극곰이 서식지를 잃었다는 보도가 대표적이다. 이런 보도는 기후 문제를 지금 이곳의 문제가 아니라, 나중 저곳의 문제로 인식하게 한다. 기후 위기의 실상을 체감하기 어렵고, 대응할 수 없는 문제로 만든다.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기사가 드물다.

따옴표 저널리즘

정재계 인사의 발언을 검증하지 않고 그대로 보도하는 관행도 문제다. 2020년 10월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독일은 탈원전 시작 후 석탄 발전소를 많이 짓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주요 언론이 그 말을 그대로 인용 보도했는데, 잘못된 정보였다. 실제로 독일의 석탄 발전소는 2011년 탈원전 선언 이후 꾸준히 줄었다. 검증되지 않은 정치인의 말이 기사가 되면 기후 문제는 정치 공방, 진실 공방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사일로에 갇힌 보도

기후 문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테크,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글로벌 OTT 서비스의 데이터 센터가 탄소 배출의 주범이라는 기사만 해도 국제, 경제, 테크, 문화가 얽혀 있다. 그런데 국내 언론의 취재 방식은 사일로에 갇혀 있다. 주요 언론사 기자들은 정해진 출입처가 있다. 교육부 출입 기자는 교육부를 드나들며 교육 기사를 쓰는 식이다. 이런 출입처 문화에서 기후 문제는 환경 기사 또는 사회 기사로만 다뤄진다. 기후 위기의 관점에서 쓴 정치 기사, 교육 기사, 스포츠 기사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IT MATTERS

“인류는 집단행동이냐 집단 자살이냐, 갈림길에 있다.” 2022년 7월 UN 사무총장이 기후 위기를 두고 한 말이다. 세계 주요 언론사는 이미 뉴스룸의 우선순위를 기후 위기에 두고 있다. 2019년 영국 《가디언》은 환경 서약을 발표했다. 전 세계가 직면한 환경 위기를 더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기후 변화’ 대신 ‘기후 위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화석 연료 채굴 기업의 광고를 싣지 않고, 2030년까지 탄소 중립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국내 언론도 변화하고 있다. 2020년 《한겨레》는 국내 최초로 기후 보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후변화팀을 만들었다. 고무적인 변화지만, 기자 네 명이 사회 전반의 모든 기후 이슈를 다룰 수는 없다. 다른 부서도 기후 보도에 참여해야 한다. 기후 문제가 보편적 가치이고 여러 분야에 걸친 문제임을 고려할 때 장기적으로는 전담팀에 맡길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의 기자가 기후 리터러시를 학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1969년 11월 12일 미국의 프리랜서 기자 시모어 허시는 작은 통신사에 기사 한 편을 송고했다. 미국 육군 중위 윌리엄 캘리가 최소 109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이튿날 주요 언론이 이 기사를 내보냈다. 이후 반전 여론이 폭발한다. 이 기사로 허시는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베트남전 종전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후 문화 전쟁이 가속하는 지금, 모든 언론인은 종군 기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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