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다이어리의 시대

2023년 11월 8일, explained

숨겨진 시장이 연결되기만 한다면, 문구 시장은 영생할지도 모른다.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NOW THIS

다이어리의 계절이다. 때맞춰 양지사의 주가가 올랐다. 다이어리를 잘 팔아서가 아니다. 서울 편입이 거론되는 김포에 공장과 본사가 있어서다. 실적은 부진하다. 디지털 기기 유통업체를 인수하며 매출이 뚜렷한 성장세를 보이기는 했으나 수익성은 악화했다. 양지사의 어려움 이면에서는 디지털 문구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WHY NOW

디지털 문구 시장은 파편적이다. 파편적인 시장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 파편들을 누군가 이어 준다면 어떨까? 이미 수많은 비즈니스는 접근성으로 새로운 고객을, 시장을 만들어 왔다. 읽고 쓰는 시장에서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문구는 새로운 정의를 찾지 못했을 뿐 사양 산업이 아닐지 모른다.

양지사

1976년 설립된 양지사는 47년간 다이어리, 수첩 제작이라는 외길만 걸으며 국내 1위를 지켰다. 양지사의 강점은 직접 제작, 직접 공급이다. 다이어리 특성상 연말, 연초에 수요가 몰리니 직접 가진 공장을 통해 제품을 만드는 편이 유리했다. 그런 양지사도 저출생과 디지털의 영향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영업적자는 무거워지고 있다. 2022년 회계연도와 비교해 적자가 1050퍼센트 커졌다. 같은 기간 매출은 449억 원에서 621억 원으로 늘었지만, 외형 성장에 그칠 뿐이었다.

사업 다각화

38퍼센트의 매출 성장은 디지털 기기를 수입하고 유통하는 기업인 ‘디지털명품존’을 인수한 효과로 분석된다. 기존 B2B 중심이었던 모델을 B2C로 확장한 것이다. 9월 개최한 주주총회에서도 양지사는 문구류 및 사무 기기 판매업과 디자인 상품 기획 및 제조, 유통 관련 사업으로 확장할 것이라 예고했다. 모나미도 마찬가지의 길을 걸었다. 모나미는 2010년 기업의 향후 50년을 책임질 사업으로 유통업을 꼽았다. 이후에는 교육 사업, 부동산 개발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1960~1970년대부터 이어졌던 문구 산업은 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문구를 찾지 않는 건 아니다.

태블릿

전 세계 태블릿PC의 보급량은 10억 대, 스마트폰 보급량의 25~33퍼센트 수준이다. 이 중에서도 태블릿에 스마트 펜슬을 사용해 직접 필기하는 이용자는 한 달 5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한국의 태블릿 시장도 고속 성장했다. 집에 태블릿PC를 둔다고 답한 응답자가 2020년 19퍼센트에서 2022년 36퍼센트로 올랐다. 태블릿 시장이 커지면서 덩달아 디지털 문구 시장도 커졌다. 종이의 질을 비교하며 서점에서 다이어리를 골랐던 과거와 달리, 이제 사람들은 종이 질감 필름과 스마트 펜슬의 펜촉을 고민한다. 다이어리도 이제는 노트 어플리케이션에 저장해 둘 디지털 템플릿으로 대체되고 있다.

디지털 다이어리

노트 어플리케이션인 ‘굿노트(GoodNotes)’에서 한 해 동안 만들어진 디지털 노트는 19억 권쯤 된다. 각자의 취향을 대변할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의 템플릿, 스티커도 등장했는데 그만큼 창작 시장, 소비 시장도 커졌다. 미국의 이커머스 플랫폼 ‘엣지(Etsy)’에서 디지털 플래너를 검색하면 56만 개의 상품이 검색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 블로그, 유튜브와 이메일, 클라우드 등으로 시장이 넓게 형성돼 있다. 대부분 개인이 제작해 판매하는 방식이다. 시장이 쪼개져 있어 디지털 문구 시장의 잠재력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다이어리를 찾아 나서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이들은 불편하게 플랫폼을 옮겨 다니면서도 자신의 취향에 꼭 맞는 디지털 플래너를 원한다.

잠재력

디지털 플래너는 기존의 문구 시장과 다른 소비자층을 겨냥한다. 저출생의 영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이다. 갓생을 살고 싶은, 아이패드를 가진 MZ세대는 쉽게 수정할 수 있고 번거롭지 않은 아이패드 다이어리를 선호한다. 쓰는 사람만 넓어지는 게 아니다. 누구나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시장이 커지는 데 유리한 요소다. 창작자들은 자기 계발을 다룬 블로그 포스팅과 함께 건강한 생활습관을 만들 수 있는 템플릿을 제작해 ‘이웃’을 모은다. 온라인 판매 플랫폼에 접근이 쉬워진 것도 초기 시장이 형성되는 데 유리했다. 펀딩 사이트나 전자상거래 플랫폼, 소셜 미디어를 통해 누구나 창작자가 되고 돈을 벌 수 있다. 전자상거래 플랫폼 카페24의 10대 신규 창업자 수는 1년 사이 59.4퍼센트 증가하기도 했다.

플랫폼의 힘

시장은 이미 형성되고 있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 이 불편함을 해소해 주겠다는 플랫폼이 나타나기도 했다. ‘페이퍼리스 문방구’를 표방하며 나선 ‘하플’은 디지털 굿즈의 구매부터 보관, 이용, 제작과 판매까지 지원하는 플랫폼이다. 플랫폼 내에서 유저들은 직접 ‘누끼’를 따 스티커를 만들거나 분위기에 맞게 태그를 지정해 스티커를 분류할 수도 있다. 플랫폼을 통하면 플랫폼은 시장의 접근과 소비를 쉽게 만든다. 한 곳에서 다양한 크리에이터를 모아 볼 수 있도록 해 성공한 선례도 많다. 서비스 9년 만에 누적 거래액 1조 원을 돌파한 수공예품 거래 플랫폼 ‘아이디어스’, 도매업체와 블로거를 한곳에 모은 쇼핑 플랫폼 ‘에이블리’가 대표적이다. 이제는 블로그에 비밀 댓글을 달거나 손품 팔지 않아도 다양한 취향을 구매할 수 있다.

2000년대 웹툰 시장

2000년대 초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웹툰 시장도 유사한 궤적을 밟았다. 1990년대 말 인터넷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아마추어 작가들이 인터넷에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개인 웹페이지, 특정 커뮤니티 등 각자의 영역 위에서 인기를 끌었다. 생활툰 〈마린 블루스〉는 개인 웹사이트에서 만화를 연재했는데, 당시 야후코리아와 엠파스 등의 포털 사이트로부터 개인 사이트 대상을 받았다. 이 파편들이 플랫폼을 만나자 거대한 시장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다음에서 연재되기 시작한 강풀의 〈순정만화〉가 인기를 끌었고, 이후 엠파스, 네이버 등의 포털 사이트에서 웹툰 서비스를 정식 론칭했다. 새로운 시장인지조차 몰랐던 웹툰은 이제 네이버 매출에서 1조 원이 넘는 파이를 차지한다.

IT MATTERS

혹자는 디지털 문구 시장이 기존의 종이 다이어리와 경쟁해야 하는 시장이라는 점에서 성장 가능성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러나 보수적인 것처럼 보이는 읽고 쓰는 시장도 기술의 변화에 따라 확장과 분리를 반복해 왔다. 책과 종이, 목소리로만 전달되던 정보가 음성으로, 영상으로, 때로는 클릭과 스크롤로 퍼져나간 것처럼 말이다. 기록에 대한 욕망, 아날로그스러운 디지털에 대한 갈증이 자리하는 시대에 디지털 문구 시장은 생각보다 더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기존의 레거시 문구 시장에게도 새로운 문이 열렸다. 기존의 제품을 다시 정의하는 데서 새로운 비즈니스가 시작된다면, 지금 문구에 필요한 새로운 정의는 저출생도, 인쇄 공장도 아니다. 기록과 무관해 보이는 평평한 액정판 위에서도 새로운 레거시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문구는 그렇게 영원히 죽지 않을지 모른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프라임 멤버가 되시고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하세요.
프라임 가입하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