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마구바네, 1932-2024

2024년 1월 4일, explained

피터 마구바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평생 카메라로 싸웠다.

2016년 6월 16일 피터 마구바네가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의 아프리카 박물관에서 자신의 저서 《6월 16일》 40주년 기념판 출간 행사에 참석했다. 사진: Lucky Nxumalo, Foto24, Gallo Images, Getty Images
NOW THIS

아파르트헤이트의 비극을 포착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사진작가이자 반인종차별 운동가 피터 마구바네(Peter Magubane)가 2024년 1월 1일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마구바네는 독방에 갇히고, 코가 부러지고, 총에 맞고, 촬영을 금지당하면서도 남아공의 인종 차별 정책을 고발하는 사진을 계속 찍었다. 그에게 카메라는 총이었다.

WHY NOW

1960년 샤프빌 흑인 대학살, 1964년 넬슨 만델라 종신형 선고, 1976년 소웨토 학생 봉기, 1990년 만델라 석방, 1994년 만델라 대통령 당선. 피터 마구바네는 남아공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마구바네는 말한다. “역사는 영감과 동기를 부여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역사를 남기고 싶습니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합니다.” 마구바네의 부고를 기록해야 하는 이유다.
피터 마구바네가 1956년에 촬영한 사진. 백인 소녀를 돌보는 흑인 하녀. 사진: 피터 마구바네

아파르트헤이트

1948년 남아공의 백인 정권은 유색 인종 차별을 법률로 공식화했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다. 인종별로 이용할 수 있는 버스, 병원, 학교가 나뉘었다. 흑인은 백인 거주 지역에 허가 없이는 체류할 수 없었다. 투표권도 없었다. 1956년 24세의 사진 기자 피터 마구바네는 유럽인 전용 벤치에 앉아 백인 소녀를 돌보는 흑인 하녀의 사진을 찍었다. 그의 사진 중 가장 유명한 사진이다. 17세기 네덜란드인이 남아공에 이주한 이래, 수백 년간 여러 인종이 섞여 지낸 사회를 강제적으로 분리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지 잘 보여 주는 사진이다.
 
1958년 남아공 소웨토. 당시 소웨토는 흑인 거주 지역이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남서쪽으로 16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사진: 피터 마구바네

드럼

마구바네는 1932년 1월 18일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의 혼혈인 지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말수레를 끌고 백인 고객에게 채소를 팔았다. 아버지가 박스형 카메라 ‘코닥 브라우니’를 사주면서 사진에 관심을 두게 된다. 그가 16세가 되던 해에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시작됐다. 마구바네는 남아공 흑인의 도시 생활과 예술, 정치, 문화를 다룬 잡지 《드럼(Drum)》을 읽고 보면서 사회 문제에 점차 눈을 떴다. 《드럼》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잔혹성을 보도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마구바네는 그 잡지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1962년 남아공 소웨토. 사진: 피터 마구바네

사진 기자

마구바네는 사진을 배우고 싶었지만, 흑인이 다닐 수 있는 대학이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업계에 발을 들이고 싶었다. 1954년 마구바네는 《드럼》에 운전기사로 취직한다. 남는 시간에 사진을 찍었다. 6개월을 다녔을 때 수석 사진 기자의 눈에 들어 첫 촬영 업무를 맡는다. 1955년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대회 현장을 찍었다. 이후 그는 운전대를 다시 잡지 않았다. 사진계 거장들과 함께 일하며 많이 배웠고, 국내외 주요 정치 사건을 카메라에 담았고, ANC 정치인들과 교류했다. 훗날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는 넬슨 만델라, 그리고 그의 아내이자 정치적 동지인 위니 만델라와도 가깝게 지냈다.
 
1976년 남아공 소웨토. 사진: 피터 마구바네

빵과 카메라

1956년 남아공 여성 2만 명이 정부 청사로 행진했다. 통행법 때문이다. 당시 흑인 남성은 정해진 구역을 벗어날 때 통행권을 소지해야 했는데, 정부가 이를 흑인 여성에게도 확대하자 통행권을 불태우고 반대 시위를 벌였다. 남아공 북서부의 소도시 제루스트에서 수백 명의 여성이 체포됐다. 마구바네는 제루스트로 갔다. 경찰은 시위 현장 촬영을 금지했다. 마구바네는 가게에서 빵 반 개를 샀다. 빵의 속을 판 다음 그 안에 라이카 M3를 숨겼다. 빵을 먹는 척하며 셔터를 눌렀다. 빵이 떨어지면 우유갑에 카메라를 숨겼다. 속이 빈 성경책 속에 카메라를 넣고, 주머니에 넣은 케이블 릴리즈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마구바네는 여성들이 경찰에 끌려가는 장면을 포착한 유일한 사진 기자였다.
 
1960년 샤프빌 학살. 사진: 피터 마구바네

투옥

1960년 정권 퇴진과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해 69명이 사망했다. 샤프빌 학살 사건이다. 이 현장에도 마구바네가 있었다. 그런데 데스크는 왜 더 가까이 다가가 찍지 않았냐고 지적했다. 이 일을 계기로 마구바네는 두려움과 충격이 사진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했다. 1969년 위니 만델라가 체포됐다. 감옥 밖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요하네스버그의 일간지 《랜드 데일리 메일(Rand Daily Mail》에서 일하던 마구바네는 시위를 촬영하다가 체포됐다. 독방에 586일을 갇혀 있었다. 1970년에 풀려났지만 5년간 한 번에 한 명 넘게 만날 수 없고 신문사 사무실에도 출입할 수 없는 금지령이 내려졌다. 5년을 유령처럼 살았다.
 
1976년 소웨토 항쟁.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176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중에는 어린 학생도 많았다. 사진: 피터 마구바네

소웨토 항쟁

1975년 활동 금지가 풀렸다. 그리고 이듬해 6월 소웨토 항쟁이 일어났다. 정부가 학교 수업의 절반을 아프리칸스어로 진행하게 하자 흑인 학생들이 들고일어났다. 아프리칸스어는 쉽게 말해 네덜란드어 방언이다. 백인 지배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마구바네는 소웨토 항쟁을 촬영한 극소수의 사진가였다. 그는 달려 나가는 시위대의 사진을 찍으려다가 시위대로부터 제지당했다. 그는 청년들에게 “기록되지 않은 투쟁은 투쟁이 아니다”라며 이 투쟁을 찍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경찰에 폭행당해 코가 부러지면서까지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찍은 소웨토 항쟁 사진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국제 사회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참상을 알게 됐다.
 
1957년 아프리카의 젊은 남녀가 춤을 추고 있다. 마구바네가 시위 사진만 찍은 건 아니다. 아프리카인의 삶과 색채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 피터 마구바네

넬슨 만델라

소웨토 항쟁 사진으로 마구바네는 다시 체포됐다가 1976년 12월 석방된다. 그때부터 그는 너무 유명해져서 정부도 함부로 다룰 수 없게 된다. 그는 《타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UN과 일했다. 그는 넬슨 만델라의 석방으로 이어진 1980년대 남아공의 혼란과 시위를 카메라로 계속해서 기록했다. 1990년 마침내 만델라가 석방된다. 만델라의 오랜 친구이자 동지였던 마구바네는 만델라의 공식 사진가로 임명됐다. 1994년 역사적인 전체 인종 선거에서 만델라가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될 때까지 만델라의 사진을 찍었다.

IT MATTERS

1994년 남아공에 새로운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고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 이후 마구바네는 비로소 취재를 중단했다. 대신 전시회와 출판 작업에 집중했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정부에서 금서로 지정됐던 《Black As I Am》을 비롯해 17권의 책을 냈다. 7개의 명예 학위와 많은 상을 받았다. 젊은 시절 아파르트헤이트의 잔혹함을 포착했던 그는 말년에는 자연을 카메라에 담았다. 특히 일몰을 찍었다. 2012년 《뉴욕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은 사람들을 다루는 데 지쳤습니다. 나는 이제 일몰을 찍습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만약에 상황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돌아간다면 나는 다시 카메라를 들고 돌아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세상에 보여 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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