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전쟁〉은 왜 흥행하나

2024년 2월 20일, explained

사실, 영화관은 팬덤 소비의 현장으로 변화했다.

1948년 8월 15일에 열린 대한민국정부수립 국민축하식에 참석한 이승만 전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모습. 사진: Bettmann via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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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극장가가 주목받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때문이다. 개봉 초기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역주행을 이어가며 70만 관객을 돌파했다. 무엇보다 여권 정치인, 정치 유튜버 등의 ‘관람 인증’이 큰 역할을 했다. 이 전 대통령을 미화한다는 야권의 비판도 오히려 화제성을 끌어올리는 형국이다.

WHY NOW

〈건국전쟁〉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사실을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담아낼 의무도 없고, 능력도 없다. 다만, 〈건국전쟁〉 현상은 2024년의 극장이 어떤 방식으로 소비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담론을 생산하는 곳이 아니라 팬덤을 강화하는 공간이 되어버린 극장의 은막 너머로, 논쟁할 능력을 잃어버린 우리 사회의 나태함이 비친다.

사실의 창의적 다룸

다큐멘터리(Documentary)라는 용어는 영국의 감독, 존 그리어슨이 만들었다. 19세기 말에 태어나 영화라는 ‘마법’에 인생을 바쳤던 사람이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다큐멘터리란 ‘사실의 창의적 다룸’이다. 즉, 다큐멘터리는 사실이 아니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아카이빙 하는 것은 다큐멘터리의 사명이 아니다.

영화의 사명

눈으로 보고 삶으로 겪으면 될 현실에 굳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감독들에게는 기록 이상의 목적이 있다. 때로 그것은 설득이고, 선동일 수도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 중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영화들이 대표적이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폭로’와 ‘비판’이라는 문법을 따른다. 자극적인 풍자와 조롱이 넘치는 것은 물론, 현실에 ‘편집’이라는 기술을 걸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는 화두를 던지고 사람들을 논쟁하게 했다. 제57회 칸 영화제가 그의 영화, 〈화씨 9/11〉에 황금 종려상을 안겼던 이유다.

이상한 관객

그렇다면 〈건국전쟁〉 또한 주장할 권리를 가진다. 문제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이다. 예를 들어 지난 12일 〈건국전쟁〉을 관람한 관객 한동훈씨는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오게 된 중요한 결정을 적시에 제대로 하신 분”이라고 평했다.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가 다룬 인물에 관한 평가다. 영화를 영화로 보지 않고 역사로 봤기 때문에 〈건국전쟁〉이라는 콘텐츠를 ‘이승만’이라는 역사로 오인하게 된다. 관객이 무지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다분히 의도된 레토릭이다. 즉, 한동훈씨는 청바지 차림으로 극장을 찾았을지언정, 관객이 아니었다.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었을 뿐이다. 관객이 아닌 정치인이 극장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의 힘

영화 역사상 최고의 재능을 지닌 다큐멘터리 감독을 꼽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레니 리펜슈탈이다. 〈올림피아〉, 〈의지의 승리〉 등 나치의 정치 선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영화들을 연출했다. 미학적으로 아름다웠으며 시대를 앞선 영화적 기술들이 총동원되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사람들을 ‘선동’했다. 나치와 히틀러를 신뢰하고 선망하게끔 마음을 움직였다. 이것이 영화의 힘이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관객에게 영향을 끼친다. 관객을 홀려버리기도 하고, 영화에 동의하는지 아닌지 논쟁을 촉발하기도 한다.

관람 인증의 의미

그런데 〈건국전쟁〉은 좀 다르다. 영화를 통해 관객을 움직인다기보다는, 영화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극장을 찾는다. 이들의 목소리가 워낙에 크다 보니, 영화가 이제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기능한다. 영화 관람 자체가 ‘우리 편’임을 구별 짓는, 상징적 행위가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화를 봤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거나 오해를 사는 경우도 생겨난다. 사실 진영을 불문하고, 정치적 리트머스 시험지로 기능한 다큐멘터리 영화의 선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번에는 총선을 앞둔 상황이다. 시기적으로 첨예하다. 또, 영화의 기능도 달라지고 있다.

팬덤 사업장

최근 영화는, 특히 극장은 예전과는 다르게 작동한다. 관객이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한 영상 콘텐츠를 보는 행위는 3~40년 전만 해도 ‘극장에 간다’는 말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언제든 나의 의지로, 혹은 나의 의지라고 오인되는 알고리즘의 선택으로 콘텐츠를 손쉽게 소비할 수 있다. 극장에 가는 행위는, 그래서 무엇보다 번거로우며 사치스러운 투자가 된다. 2시간과 1만 5000원이라는 자원을 투자했는데,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관객은 ‘보장된’ 영화로 몰린다. 마블과 같은 프랜차이즈 영화나 콘서트 영화 등이 그것이다. 한때 영화는 팬을 만드는 매체였다. 스타의 팬, 스토리의 팬, 세계관의 팬, 매체의 팬. ‘시네필’이라는 용어 자체가 영화의 힘이 어디에 근거하는지 증명한다. 그런데 이제 영화는, 특히 극장 영화는 팬덤에 의지하는 매체가 되고 말았다.

내가 고른 확증 편향

이러한 현상이 정치와 만난 결과가 〈건국전쟁〉이다. 이 영화는 담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담론을 증명한다. 따라서 ‘우리 편’임을 인증하고자 하는 정치인들이 극장으로 향한다. 관람 ‘인증’을 남긴다. 반대 진영은 비판의 날을 세운다. 그 결과 우리는 영화가 무엇에 주목하고 무엇을 담지 않았는지 보지 않고도 알게 된다. 내 생각과 영화의 주장이 일치하는지 검증 가능해진다. 내가 동의할 만한 담론만을 골라 보여주는 유튜브의 알고리즘처럼, 우리는 정치적인 다큐멘터리 영화를 관람할 때도 안전한 선택에 머문다. 권선징악의 스토리에 짜릿함을 느끼듯 나의 정치적 신념을 확인받으며 고양된다.

IT MATTERS

칼 세이건은 과학적 진보의 핵심 가치로 비판적 사고와 논쟁을 강조한다. “과학은 가장 존경받는 인물의 견해를 반증한 사람에게 제일 큰 보상을 안긴다”는 것이다. 과학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건국전쟁〉 현상은 논쟁을 적극적으로 피하며, 안전한 담론 안에 머물고자 하는 우리 사회의 나태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논쟁 없는 민주주의는 없다. 숙의와 토론 없는 다수결은 독재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정치는 논쟁이 아니라 네 편과 내 편을 가르는 구별 짓기에 몰두한다. 이런 행태는 우리 사회 전체의 풍토가 되었다.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내 생각과는 다른 가치관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이제 선택되지 않는다. 극장에 불어온 정치 다큐멘터리 열풍은, 그래서 또 다른 형태의 팬덤 소비다. 물론, 생각이 다른 관객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런 관객이 지금보다 충분히 더 많아져야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 역할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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