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에 한 번 발행되는 신문

2024년 3월 8일, explained

종이 신문의 문제는 ‘종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올해 발행된《라 부지 뒤 사뻬르(La Bougie du sapeur)》를 읽고 있는 프랑스 시민. 사진: 《La Bougie du sapeur》
NOW THIS

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날이 있다. 2월 29일, 윤일(閏日)이다. 인간의 계산과 자연의 규칙 사이의 간극을 맞추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하루다. 프랑스에서는 윤일이 좀 더 특별하다. 오직 윤일에만 만날 수 있는 신문이 발행되기 때문이다. 유머와 풍자로 가득한, 《라 부지 뒤 사뻬르(La Bougie du sapeur)》다. 1980년 처음 출간된 이래 완판 행진을 이어오고 있다. 코로나19로 외출 자체를 꺼렸던 지난 2020년에도 12만 부가 팔려 나갔고, 올해도 20만 부를 찍었다.

WHY NOW

4년에 한 번만 발행되는 신문. 그것도 오직 뉴스 가판대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이 농담 같은 신문은 디지털 시대의 저널리즘 공식을 보란 듯이 거스른다. 새로운 소식을 빠르게 전달해야 하는 뉴스의 숙명, 종이와 전파를 뛰어넘어 온라인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도전 등과는 아무 상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라 부지 뒤 사뻬르》는 열광적인 팬을 거느리고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간다. 그리고 질문한다. 2024년, 우리는 과연 어떤 저널리즘을 원하는지 말이다.

특종 없는 신문

4년에 한 번 발행되는 만큼, 《라 부지 뒤 사뻬르》는 특종과 관계가 없다. 대신 말장난과 풍자로 맛을 더한 ‘해설’이 가득하다. 올해 발간된 12호에는 ‘우리 모두 더 똑똑해진다’는 헤드라인이 1면 상단에 실렸다. 생성형 AI의 발전과 프랑스의 학교 교육에 관한 내용이다. 올해 개최 예정인 파리 올림픽 관련 내용도 실렸다. 보안상의 이슈를 피하기 위해 행사 기간 에펠탑을 해체한 뒤 이케아에 에펠탑 재조립 매뉴얼을 제작하도록 의뢰하자는 아이디어다.

농담인데, 뼈 있는

엉뚱하고 장난스럽게 느껴지지만, 프랑스 사회의 뜨거운 담론을 비틀어 제시하는 내용이다. 신문은 4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윤일을 기념하는 일종의 ‘굿즈’로, 퇴근 후 동료와 맥주 한 잔을 기울이며 나눌 이야깃거리로 기능한다. 아무도 이 신문에 새로운 소식이 실려 있지 않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어차피 새로운 소식이 너무 흔하고 가치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월한 기사의 조건

전통적으로 뉴스는 기자 직군이 생산해 왔다. 그리고 기자의 가치, 언론사의 가치를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가 바로 ‘특종’이다. 그런데 특종이란 무엇일까. 현장의 기자들이 이야기하는 정의는 “이 보도가 아니면 드러나지 않았을 진실을 파헤침으로써 사회에 바람직한 방향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정의는 언론을 ‘제3의 권력’으로 정의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즉, 특종이 언론사에 세계를 움직이는 힘을 부여한다. 그래서 특종은 여러 종류의 기사 가운데 가장 우월한 지위를 부여받는다.

특종의 수명

보다 구체적으로 특종의 요소를 살펴보면 ‘단독’과 ‘최초’가 있다. ‘단독’은 특정 매체만 제공하는 소식에 해당한다. 주로 기획을 통해 이슈를 발굴한 것으로 공적 담론을 풍부하게 한다. 그런데 [단독]을 붙여 포털에 송고되는 순간, 단독 기사는 더 이상 단독이 아니게 된다. 유사한 내용의 기사가 순식간에 여럿 생성된다. 베껴 쓰기 때문이다. ‘최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보도 자료 등을 통해 이미 공개된 내용이기 때문에 [최초]의 보도가 유의미한 기간은 5분 남짓이다.

정보와 담론의 무게

특히 [최초] 기사의 경우 ‘시간차(ephemeral) 특종’에 해당한다. 특정 기자나 매체가 보도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알려지게 되는 정보다. 예를 들어 프랑스 파리가 2024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다는 정보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뉴스는 발표 직후 어디서든 당연히 보도될 만한 내용이다. 즉, 파리 시민 입장에서는 이 소식을 다른 매체보다 5분 먼저 보도해 주는 매체를 열독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행사 기간 중 벌어질 불편과 소동에 관해 풍자적인 담론을 제시하는 《라 부지 뒤 사뻬르》의 엉뚱한 기사가 더 가치 있다.

동형화의 함정

하지만 뉴스 ‘생산자’ 즉, 기자와 언론사 입장에서는 다르다. 단독이든 최초든, 다른 언론사가 받아써 갈 만한 기사를 쓴다면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런 ‘업계 관행’이 시간차 특종을 위한 경쟁을 지속하는 동력이다. 이렇게 뉴스 생산자와 수용자 사이의 간극이 벌어지는 동안 전통적인 의미의 저널리즘은 위기에 몰렸다. 종이라서 사지 않는 것이 아니다. 빠르지 않아서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콘텐츠다.

다시, 매거진으로

최근 몇 년간 관찰되는 저널리즘의 형태 변화는, 그래서 유의미한 시사점을 남긴다. TV에서는 ‘토크 뉴스’가 급부상했다. 시간을 들여 맥락과 해설을 제공하고, 날것의 토론을 전개한다. 다만, 이런 포맷은 편성 자원이 한정적인 전통적 TV 플랫폼보다 유튜브 등의 디지털 플랫폼에서 더 강점을 갖는다. 신문도 달라지고 있다. 주말판을 강화하는 전략을 넘어 이제는 뉴스레터에 공을 들이고 있다. 정보에 방점을 찍는 ‘보도’의 영역을 벗어나 콘텐츠의 경험 자체를 풍성하게 제공하는 ‘매거진’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추세다. 최초와 단독이 하나도 없는, 《라 부지 뒤 사뻬르》처럼 말이다.

IT MATTERS

미국의 경우 1990년대부터 주요 신문의 주말판 발행 부수가 주중판을 앞질렀다. 스마트폰 알림으로 뜨는 파편화된 정보가 아니라 공들여 길게 쓴 기획 기사를 읽을 여유는 토요일 아침에야 생기기 마련이다. 종이에 담겼든, 유튜브 영상으로 풀어냈든 이제 수용자는 더 깊고 넓은 담론을 원한다. 취재하는 기자보다 생각하는 칼럼니스트가 더 많이 선택받는다. 이미 저널리즘을 둘러싼 생산자와 수용자 간의 경계는 흐릿해졌다. 저널리즘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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