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드라마가 사라진다

2024년 3월 27일, explained

K-콘텐츠가 N-콘텐츠의 꿈을 꾼다. 그래서 제작비가 오른다.

이병헌 감독이 연출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닭강정〉의 티저 이미지. 사진: 넷플릭스
NOW THIS

완성된 영화와 드라마가 관객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넷플릭스에, 편성표에 자리가 없다. 배우 김재중과 진세연이 출연한 드라마 〈나쁜 기억 지우개〉는 2년째 편성을 기다리는 중이다. 한때 화제가 됐던 배우 송중기 주연의 영화 〈보고타〉, 차인표 주연의 시트콤 〈청와대 사람들〉도 아직 관객을 만나지 못했다.

WHY NOW

K-콘텐츠의 전성시대라는 수식은 익숙하지만, 최근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K-영화와 드라마가 들어설 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배우의 출연료 급등, 제작비 상승 등의 직접적 원인이 지목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 지금의 K-콘텐츠는 N-콘텐츠의 꿈을 꾼다. 왜 한국 콘텐츠는 넷플릭스만을 바라보며 질주할 수밖에 없게 됐나.

출구 없음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촬영을 끝마치고도 영화관이나 OTT 등의 출구를 찾지 못한 영화는 100여 편에 이른다. 드라마 쪽 상황도 마찬가지다. 방송사와 OTT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드라마를 기획하거나 편성하기 어려워졌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에 따르면 국내 연간 편성 드라마는 2022년 141편에서 지난해 123편으로 줄었고, 올해는 100여 편 정도다. 2년 사이 30퍼센트가 줄었다. 막대한 돈을 들여서 찍었는데 회수할 방법이 없으니 스태프들도 굶고 있다. 지난해 접수된 드라마 제작 스태프의 임금 체불 피해 건수는 192건이었다. 연간 평균치인 72건의 2.6배 수준이다.

재정 긴축

영화 〈기생충〉이,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K-콘텐츠에 찬 바람이 분다. 광고 매출의 지속적인 하락과 제작비 증가가 그 원인이다. 2021년, 디지털 광고의 점유율은 57.3퍼센트에 달했으나 방송은 23.8퍼센트에 그쳤다. 시청률 부진과 OTT로의 시청자 유출 때문이다. 제작비 증가에는 주연급 배우들의 출연료가 한몫했다. 지난 1월 진행된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간담회에 참석한 한 방송사 관계자는 “주연 배우들의 출연료가 회당 10억 원에 달하는 게 현실”이라며 “그럼에도 드라마 편성이 용이하게 담보되는 연기자의 요구에 맞춰 회당 수억 원을 지불하며 제작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토로했다.

출연료

지난해 연기자 임금 보고서에 따르면 톱스타급의 회당 출연료는 2억 원이 기본, 10억 원 이상을 기록한 경우도 있었다. 1990년대까지 배우의 출연료는 등급제 방식으로 결정됐다. 일정한 서열별로 연기자의 작품 방영 회당 출연료를 정해 놓는 제도다. 1990년대부터 드라마 제작이 외주화되면서 공채 시스템이 붕괴하고 전속으로 활동하는 배우가 줄었다. 2000년대에는 캐스팅 매니저가 생기면서 특정 인기 배우에게 돈과 일이 몰렸다. 지금은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서라도 톱스타를 쓰는 것이 공식이 됐다. 이상한 일이다. 영화를 만들지 못할 정도라면, 톱스타가 아닌 배우를 쓰면 된다. 그런데 시장이 그렇게 굴러가질 않는다.

넷플릭스 슬롯

2000년대부터 시작된 톱스타의 몸값 상승은 2017년, 넷플릭스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OTT가 뉴노멀로 자리 잡은 시장에서 콘텐츠의 수익은 광고와 같은 전통적 영역이 아닌 해외 판매와 IP 수익에서 나왔다. 성공하려면 이미 해외에서 알려진 배우들을 기용하거나 판매에 유리한 블록버스터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넷플릭스의 한해 슬롯(방영 편수)은 15편 내외다. 그 슬롯 안에 들어가려는 작품은 2000개 넘게 쌓여 있다. 빠르게 관객을 만나기 위해서는 넷플릭스의 기준에 맞춰야 한다. 알려진 얼굴을 쓰고, 성공한 감독을 쓰고, 익숙한 서사를 써야 한다. 요컨대 지금의 K-콘텐츠의 중심은 K가 아니다. 넷플릭스가 작품을 고르고, 배우를 결정하고, 미래의 콘텐츠 풀을 구획한다. 2억 명의 구독자를 자랑하는 넷플릭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 제작비는 올라갈 수밖에 없다.

제작비 인플레이션의 여파

한국 영화 산업은 메인 투자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제작자가 중심이 돼 자본을 조달하는 방식이 아닌, 투자사와 배급사가 제작비의 상당액을 투자하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메인 투자자 역할을 해야 하는 토종 OTT나 방송사가 넷플릭스 수준에 맞춘 제작비를 감당할 여력이 없다. 그 여파로 드라마가 사라지고 있다. 현재 일일드라마 세 편을 제외하면 평일 드라마를 만드는 방송사는 KBS2, tvN, ENA로 세 곳뿐이다. 방송사 예산은 정해져 있는데 드라마 제작비가 너무 올라 편성 수를 줄였다. 토종 OTT 업체 역시 드라마 투자와 제작을 중단하거나 대폭 축소하고 예능과 시사교양, 다큐멘터리 장르에 집중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국내 OTT ‘웨이브’는 지난해 오리지널 드라마로는 두 개 작품만을 선보였고, 효자 콘텐츠였던 드라마 〈약한 영웅〉 시즌2는 결국 넷플릭스로 자리를 옮겼다.

IP 양도

제작사의 속내도 암울하긴 마찬가지다. 넷플릭스는 제작비를 지원하고 제작사에 5~10퍼센트의 고정수익을 보장한다. 대신 IP를 가져가게 되는데, IP를 통해 만들 수 있는 2차 저작물을 비롯한 부가 수익이 모두 넷플릭스의 몫이 된다. 넷플릭스는 〈오징어 게임〉에 제작비 253억 원을 쓰고 1조 520억 원을 벌어들였다. 제작사의 마진은 제작비의 10퍼센트가량인 20억 원 수준이다. 벌어들인 돈에 비해 턱없이 적은 마진이지만, 현장에선 대부분이 불확실한 성공보다 안정적인 5퍼센트의 고정수익을 원한다. 넷플릭스가 파고든 한국 콘텐츠 시장의 맹점이다. 바늘구멍 같은 넷플릭스의 등용문 앞에서, 제작자들은 제작 규모를 키우고, 5퍼센트의 안정적인 성공을 위해 작품을 만든다. 

혁신의 동력

이런 기형적인 구조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얼마 전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파묘〉의 제작비는 140억 원에 달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1위 〈닭강정〉은 흥행 2위에 자리한 영화 〈극한직업〉을 만든 이병헌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넷플릭스가 만든 제작비와 작품 기준, 등용문을 답습할 수밖에 없는 영화계는 성장과 혁신의 동력을 잃기 쉽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뛰어난 창작자와 배우가 있기에 좋은 작품은 계속 나올 수 있겠지만, 드라마와 영화 제작 환경이 더욱 악화하면 중간급에 해당하는 작품이 줄어들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신인 창작자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무너지면서 수십 년간 어렵게 구축한 K-콘텐츠의 토대가 흔들릴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IT MATTERS

영화는 생태계다. 배우와 작가, PD와 감독, 극장과 OTT, 관객과 산업이 조화롭게 얽혀야만 관객을 만날 수 있다. 수백억 원의 제작비를 쓰고, 무리해 톱스타와 유명한 감독을 써야만 관객을 만날 수 있는 구조라면 생태계는 유지되기 어렵다. 이전의 것이 동력을 잃어 갈 때 필요한 건 새롭게 도전하는 다음 세대다. 비워진 생태계에 다음 세대는 없다. K-콘텐츠는 그렇게 천천히 죽는다.

지금의 제작비 인플레이션의 여파는 배우 출연료에 대한 일방적 규제만으로, 넷플릭스에 영화발전기금을 걷는 것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넷플릭스가 만든 구조 아래에서, 한 방향만 바라보는 시장에서는 실패의 동력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기생충〉을 만든 봉준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고작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로부터 3년 뒤,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을 들고나온다. 때맞춰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시기가 열린다. 지금의 K-콘텐츠에서는 요원한 일이다. 그 원인을 꼬집어야만 K-콘텐츠의 다음 세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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