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이 사라져도 괜찮을까

2024년 5월 3일, explained

대한극장이 문을 닫는다. 영화는 가까워졌고 극장은 멀어진다.

1962년 〈벤허〉를 장기 상영하던 대한극장의 모습. 사진: 한국정책방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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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충무로에 위치한 대한극장이 문을 닫는다. 1958년 개관했으니 66년 만이다. 좌석 수는 천 900여 석에 달했다. 당시로서는 한국 최대 규모였다.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멀티플렉스 3사 중심으로 재편된 극장 산업 구조 속에서 대한극장은 위태롭고 애매했다. 어찌 보면, 오래 버텼다.

WHY NOW

대한극장은 한국의 관객에게 영화가 어떤 의미였는지, 그 역사를 오롯이 품고 있는 곳이다. 영화관과 관객의 거리는 불과 몇 년 만에 멀어졌다. 영화와 관객의 거리가 무한히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대한극장의 위기와 부활, 그리고 마지막까지를 따라가면 우리에게 영화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무언인지가 어렴풋이 보인다.

애국의 심볼

1988년, 서울 명동 코리아극장 객석에서 뱀 네 마리가 발견되었다. 이어 신촌 신영극장 여자 화장실에서도 뱀 열 마리가 나왔다. 도시 한복판으로 뱀이 기어들어 온 것이 아니었다. 젊은 영화감독 몇이 의기투합해 벌인 테러였다. 두 극장 모두 마이클 더글러스 주연의 〈위험한 정사〉를 상영 중이었다. 영화시장이 개방된 뒤 미국 영화사들이 연합하여 세운 ‘UIP코리아’의 첫 직접 배급 영화였다. 위험한 소동 때문인지 〈위험한 정사〉는 곧 극장에서 내려갔다. 그러나 영화 산업의 거대한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선진국의 증명

한국 영화를 지키자는 결기로 뱀을 푼 감독 중에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부러진 화살〉, 〈블랙머니〉 등을 연출한 정지영 감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정 감독의 영화도 창투사의 투자를 받아 제작되고,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걸린다. 시장을 개방하면 다 같이 죽을 줄 알았지만, 늦지 않게 돈과 인재를 수혈한 한국 영화계는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다. 영화가 달라지는 동안 관객도 달라졌다. 그리고 극장도 달라졌다.

최고의 볼거리

대한극장은 미국 20세기폭스필름이 설계했다. 최초로 70mm 영사기를 도입했다. 가로 24m, 세로 19.5m의 초대형 스크린에 최첨단 음량 시스템도 구축했다. 지금으로 치면 ‘용아맥’에 준하는 위용을 자랑했다는 얘기다. 〈벤허〉, 〈사운드 오브 뮤직〉, 〈아라비아의 로렌스〉 등 대작들이 대한극장을 개봉관으로 택했던 이유다. 특히 59년 작 〈벤허〉의 경우 대한극장에서 1962년 2월부터 약 7개월간 장기 상영했고 당시로서는 70만 명이라는 이례적인 흥행 기록을 세웠다. 단순 계산을 한다면 당시 서울 인구 250만 명 중 4분의 1이 대한극장을 찾아 〈벤허〉를 관람한 셈이다.

대기업의 신사업

그런데 시장이 달라졌다. 멀티플렉스의 등장이다. 경제가 성장하고 호황기를 누리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IMF 외환위기 직후였던 1998년부터 위기 속에서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나선 대기업들이 움직였다. 영화 제작과 배급부터 상영관까지 수직계열화를 꿈꾼 CJ는 ‘CGV강변11’을, 케이블TV와 함께 투자 및 배급에 뛰어들며 제과 산업의 성장 정체를 극복하고자 했던 오리온은 ‘메가박스 코엑스점’을, 유통 기업의 특기를 살려 영화관으로 시작해 투자 및 배급까지 영역을 확장하게 되는 롯데는 롯데백화점 일산점에 ‘롯데시네마’를 개관했다.

프랜차이즈 미디어

이때부터 멀티플렉스가 아니어도 2개 이상의 상영관을 가진 복합관들이 대세로 자리 잡는다. 스크린 수가 늘어나자, 극장의 힘은 빠지고 배급사가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걸지 않겠다고 버티면 배급사로서는 방법이 없었지만, 이제는 상영할 스크린이 넘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대기업 자본이 본격적으로 투입되었으니, 극장마다 시설 경쟁도 본격화했다. 결국 작은 극장들은 여럿, 폐업 수순을 밟았다. 한때 충무로를 호령했던 ‘단성사’와 같은 극장도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의 변신을 꾀했지만 결국 스크린을 내리고 말았다.

예술, 문화, 오락

단성사에 비하면 대한극장은 꽤 성공적으로 새로운 시장에 적응했다. 2000년 5월 문을 닫고 재정비에 들어갔고, 250억 원을 투입해 2001년 12월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거듭났다. 11개 상영관을 갖춘, ‘코엑스 메가박스’에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 스펙이었다. 발 빠른 대처와 대한극장이 가진 상징성도 한몫했다. 한동안 시사회나 관객과의 대화 등 주요 행사가 대한극장에서 집중적으로 열렸던 이유다. 그러나 CGV에는 있지만 대한극장에는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쇼핑몰과 맛집이다.

공기처럼 당연한 콘텐츠

2010년대 들어 대한극장은 CGV에서 매진된 영화도 예매 없이 볼 수 있는 곳으로 포지셔닝하기 시작했다. 극장 시설은 부족하지 않았다. 부족한 것은 ‘입지’였다. 아파트 단지를 끼고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에 영화 관람 전후로 즐길 거리가 별로 없다. 정확히는 인스타에 올릴 거리가 없다. 이래서는 지하철 도보 30초라도 소용없다. 한때 영화는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그 목적을 위해 극장은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지금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다. 볼 수 있다 해도 열악한 화면비와 거친 편집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이제 영화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릴 수 있는 공기와도 같은 콘텐츠다. 팬데믹과 OTT가 관객의 경험치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제 극장은 일정이다. 즐길 거리의 일부로 일정에 포함되는 목적지라는 얘기다.

IT MATTERS

넷플릭스는 콘텐츠의 가치를 완전히 뒤엎었다. 영화 티켓 7천 원이 당연했던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콘텐츠 소비 방식이 이제는 일반화되었다. 금요일 저녁, CGV에서 만 5천 원을 주고 영화를 보는 일은 이제 꽤 사치스러운 취미다. 같은 값이면 OTT에서 무한한 콘텐츠를 누릴 수 있다. 대한극장을 운영해 온 세기상사가 밝힌 영업 종료 결정의 이유, “영화 상영 사업의 패러다임 변화로 인한 지속적인 적자”는 OTT 서비스 대중화의 필연적인 결과다.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와 같은 멀티플렉스의 사정은 어떨까.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23년도 국내 연간 박스오피스는 1억 천200만 명으로, 코로나19 발생 직전인 2019년도와 비교해 반토막 수준이다. 떠난 관객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평균 티켓 가격은 2023년 1분기 이후 내려가고 있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아직 크게 체감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결국, 코로나19 이후 영화관의 위치가 도심에서 외곽, 교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인다. 극장은 이제 우리 일상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태블릿으로 얼마든지 몰입해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시대다. 대한극장이 문을 닫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시대적 흐름일 수도 있다. 다만, 이러한 변화 앞에 아직 준비되지 못한 우리 영화판에 관해 논의가 부족하다는 점은 리스크다. 예를 들어, 영화관에서의 성적이 최종 수익의 규모를 결정하는 한국 영화 시장 구조 속에서 작은 영화, 다양성 영화의 설 자리가 줄어들 수도 있다. 마음먹고 외출해 어두운 극장 안에서 스마트폰을 꺼 두고 감상해야 100퍼센트의 감동을 누릴 수 있는 영화도 잊힐 가능성이 크다. 가족 앞에서 체면을 차리지 않듯, 우리는 넷플릭스 화면 앞에서 정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라지는 극장을 못내 아쉬워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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