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의 사법화

2024년 4월 18일, explained

정치가 기후를 외면했다. 그래서 기후가 법정으로 갔다.

2022년 6월 13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아기 기후 소송’ 기자 회견. 사진: 녹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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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3일 아기 기후 소송의 헌법 소원 공개 변론이 열린다. 2022년 6월 정부의 기후 변화 대응이 미흡해 아기들의 기본권이 침해됐다며 제기된 헌법 소원이다. 청구인은 5세 이하의 아기들이다. 이번 공개 변론은 헌법재판소가 진행 중인 기후 헌법 소원 4건을 병합해 진행한다. 헌법재판소는 중요 사건 중에서도 국민적 관심이 높은 사건에만 공개 변론을 진행한다.

WHY NOW

세계 각국에서 기후 소송이 벌어지고 있다. 기후 위기에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묻는 판결도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법정 다툼은 길고, 비용이 많이 들고, 정부와 기업이 법원 판결에 불응하기도 한다. 기후 재판은 기후 운동에 있어 분명 진일보한 사건이지만, 법원은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 아니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법원이 책임을 떠맡고 있다.

아기 기후 소송

2022년 6월 아기 기후 소송단은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2018년 대비 40퍼센트로 설정해 아기들의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 기후 위기로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될 아기들 62명이 소송의 청구인이다. 5세 이하 아기 39명, 6~10세 어린이 22명, 태아 1명이 청구인으로 참여했다. 딱따구리라는 태명의 20주 차 태아가 소송의 대표 청구인이다.

노년 기후 진정

아기들만 문제를 제기하는 게 아니다. 3월 6일에는 노인들이 국가인권위원회 앞에 모였다. 이들은 기후 위기가 노년층에게 생명 박탈의 위험이라며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123명이 참여했는데, 평균 연령은 63세, 최고령은 92세다. 진정인들은 세계 각국이 산업화 이전 대비 평균 기온 상승을 1.5도 이하로 억제하자는 파리 기후 협약을 지키려는 노력을 정부가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스위스 노인 여성

4월 9일 유럽에서는 역사적 판결이 나왔다. 64세 이상 스위스 여성 2400여 명으로 이뤄진 환경 단체 ‘기후 보호를 위한 노인 여성’은 2020년 유럽인권재판소(ECHR)에 스위스 정부를 상대로 인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스위스 정부가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한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기본권이 침해됐다는 이유였다. 특히 자신들 같은 노인 여성이 가장 취약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2022년 여름 폭염으로 유럽에서 6만 1000명이 사망했는데, 여성 사망자가 남성보다 56퍼센트 많았다. 사망자 절반은 80세 이상이었다.

국제 법원의 판단

ECHR은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국제 법원이 기후 위기에 국가가 시민에 대한 의무를 지닌다고 판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ECHR은 스위스 정부가 해당 단체에 8만 유로(약 1억 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로 기후 문제는 인권 문제가 됐고, 국가의 노력이 미흡할 경우 국가에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됐다. 유럽 최고 법원의 판결은 앞으로 유럽 국가의 법원에서 제기될 수많은 소송의 선례가 될 수 있다.

법정으로 가는 기후 위기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후 소송은 지난 5년간 2180건에 달한다. 좋은 선례를 만드는 판결이 속속 나오고 있어 향후 소송의 전망도 밝다. 기후 위기 대응에 있어 분명 진일보한 사건이지만, 근본적인 물음이 남는다. 기후 소송이 증가한다는 것은 기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정치인들이 기후 문제를 진지하게, 시급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치가 기후 문제를 외면해, 기후 문제가 법정으로 가는 것이다.

소송의 이면

소송이 능사는 아니다. 소송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스위스 여성 노인이 승소한 최근 ECHR 재판도 2020년에 제기돼 4년이 걸렸다. 그런데 사실 이 소송은 2016년 스위스 법원에서 처음 제기됐다. 세 차례나 소송이 제기됐다가 모두 기각돼 ECHR로 갔다. 스위스 법원까지 포함하면 승소까지 8년이 걸렸다. 정부의 기후 대응이 부족해 노인의 기본권이 침해된다는 소송인데, 8년은 너무 길다. 게다가 소송에는 많은 비용도 들어간다.

항소

환경 단체가 승소한다고 문제가 바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2021년 네덜란드 1심 법원은 석유 회사 쉘에 탄소 배출량의 45퍼센트를 줄이라고 판결했다. 그런데 쉘은 항소를 제기해 지난 4월 2일부터 항소심 심리가 열리고 있다. 1심 소송 이후 쉘은 탄소 배출 저감 목표를 일부 후퇴시키기도 했다. 또한 최근에는 화석 연료 회사가 환경 단체의 통계가 잘못됐다며 소송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IT MATTERS

법원은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 아니다. 4월 10일 사이먼 스티엘 유엔기후변화협약 사무총장은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시간이 2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경고했다. 현재 상황으로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거의 줄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이제라도 더 강력한 계획을 빨리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법원은 너무 늦다. 지구를 구할 책임을 판사에게만 지우는 건 고맙지만, 사양할 일이다. 기후를 법정으로 보낸 정치가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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