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절멸 위기

2024년 5월 7일, explained

유럽이 사망할 수도 있다. 프랑스 대통령의 진단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022년 2월 8일 독일 베를린에서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위기를 논의하기 위한 바이마르 트라이앵글 회의에 앞서 언론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Hannibal Hanschke - Pool/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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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불멸이 아니다. 우리의 유럽은 죽을 수도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진단이다.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는데, 유럽은 달라진 세계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현지 시각으로 지난 4월 25일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연설 내용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이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주저앉고 있다고 생각한다.

WHY NOW

미국과 유럽의 단단한 동맹을 기반으로 구축된 세계질서가 2차 세계 대전 이후 게임의 규칙이었다.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 진영이 무너진 이후, 그 규칙은 더욱 공고해졌다. 그런데 마크롱 대통령은 시대가 변화했다고, 세계의 작동 원리가 달라졌다고 강조한다. 유럽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그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크롱 대통령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죽는 것은 유럽뿐만이 아니다. 이것은 어쩌면 한국이 더 귀 기울여야 할 경보일 수 있다.

의제 1: 유럽은 안전한가.

소르본 대학에서 강의 이후 마크롱 대통령은 영국 《이코노미스트(Economist)》와 인터뷰를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놨다. 유럽이 직면한 위험을 크게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 번째가 바로 지정학적 위험이다. 냉전이 끝났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세계는 지금 두 개의 거대한 전쟁을 치르고 있으며, 그중 하나는 유럽 대륙이 물리적인 위협에 직면해 있다는 증거다. 마크롱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면 푸틴이 멈추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몰도바, 루마니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들의 안보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묻는다.

진단 1: 미국이 항상 유럽을 지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 답은 미국이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미국이 돈과 힘을 지원하는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였다. 하지만 마크롱 대통령은 NATO 체제를 신뢰하지 않는다. 근거가 있다. 2019년 미국은 시리아 북동부의 쿠르드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했다. IS 격퇴를 위해 손잡았던 쿠르드족을 ‘토사구팽’한 것 아니냐는 비난이 나왔다. 유럽이라고 다를 이유는 없다. 미국이 유럽을 지켜줄 것인지는 동맹 여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결정할 것이다. 특히, 올해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NATO가 아닌 유럽이 스스로 유럽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마크롱 대통령의 주장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변화 1: 방위비는 오르고 무기 수출은 줄어든다.

주장을 뒷받침할 방법론도 있다. 프랑스는 핵보유국이다. 영국도 그렇다. 이를 이용한 새로운 핵우산론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유럽 안보 프레임을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 마크롱의 계획이다. 물론, 그의 계획대로 진행되리라는 법은 없다. EU(유럽 연합)의 또 다른 강자, 독일이 선뜻 그 손을 잡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미국과의 동맹에 안보를 의존한다는 패러다임에 균열이 시작된다면 그 여파는 전 세계로 확산할 수 있다. ‘한국은 부자 나라’라며 방위비 추가 분담을 주장한 트럼프 전 대통령이든, 유럽이 유럽산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마크롱 대통령이든 우리나라에 좋은 소식은 아니다.

의제 2: 유럽은 가난한가.

물론, 지금 유럽인들은 일상에서 이미 전쟁을 치르고 있다. 두 번째 위협은 물가와의 전쟁이다. 프랑스에서는 푸아그라와 와인을, 스페인에서는 올리브 오일을 포기하고 있다. 한때 유기농 식품의 천국이었던 독일 마트에서는 관련 제품에 먼지가 쌓이고, 파스타 가격이 급등하면서 이탈리아에서는 주무 부처가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전쟁 때문에 튀어 오른 인플레이션의 탓으로 돌리기엔 데이터가 너무 좋지 않다. 1인당 GDP 측면에서도 미국과 유럽 간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만 해도 미국과 프랑스의 1인당 GDP 차이는 3000달러 정도였다. 그러나 2022년에는 그 차이가 무려 3만 6000달러까지 확대되었다. 독일이라고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2011년 이후 미국과 유럽의 격차는 한없이 벌어지고 있다.

진단 2: 너무 많이 규제한다.

이에 대한 미국 언론의 진단은 ‘고령화’다. 2000년대 들어 본격화한 저출산 기조가 2020년대 유럽을 덮쳤다는 것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결이 다른 부분을 지적한다. 유럽이 “너무 많이 규제하고, 충분히 투자하지 않고, 충분히 보호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이대로라면 첨단 기술 분야에서 뒤처지고 만다는 위기의식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미국의 AI 공룡 기업들을 정조준한 ‘유럽 AI 법(EU AI ACT)’를 두고 끝까지 망설였다. 자국의 ‘미스트랄AI’와 같은 AI 스타트업의 발목을 잡지 않을지 계산기를 두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혁신, 중국은 복제, 유럽은 규제”라는 우스갯소리에 유럽은 마냥 웃을 수 없다. 실제로 한 연구에 따르면 일반 데이터 보호 규정(GDPR)으로 인해 향후 2년간 유럽의 벤처 투자가 미국에 비해 감소할 전망이다.

변화 2: 유럽도 체면을 버릴 수 있다.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가 상업적인 성공까지 증명해 보이는 가운데, 그 대항마로 EU가 개발 중인 것이 아리안 6호다. 인공위성을 지구 궤도로 운송하는 용도 등으로 이용할 최신 대형 로켓으로, 유럽우주국(ESA)이 주도하고 프랑스의 아리안스페이스가 제작을 담당한다. 유럽의 자존심이다. 그러나 마크롱 대통령은 이를 유럽 산업 정책의 실패 사례로 꼽았다. 개발 과정에서 유럽우주국의 각 회원국이 분담금을 낸 만큼 자국 기업이 개발 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다 보니, 복수의 생산 시설이 건설되어 불필요한 비용이 발생했다. 각국이 자국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하다 보니 효율적인 협업도 이뤄지지 않았다. 실제로 아리안 6호는 당초 예상보다 개발 기간이 길어지고 예산도 증가해 난항을 겪고 있다. 판을 뒤집으려면 달라져야 한다. 손해 볼 각오를 하지 않으면 새로운 시도는 불가능하다. 리스크를 감수하고 혁신 프로젝트를 추진하자는 마크롱의 주장 뒤에는 형평성보다 경쟁력 제고에 방점을 둬야 한다는 가치가 담겨있다. 마크롱은 투자은행가 출신이다. 기업을 키워야 한다는 정책 기조가 당연하다. R&D 지출을 크게 확대하고 규제를 완화하자는 주장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같은 자국 우선주의 경제 정책이 유럽 버전으로도 나올 수 있다.

의제 3: Politics is Eros versus Thanatos.

물론, 안보와 경제에 있어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그 과정에서 프랑스가 EU의 패권국이 되겠다는 마크롱의 전략은 정치적인 기반이 단단해야 가능한 얘기다. 세 번째 위기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꼽은 이유다. 마크롱 입장에서는 지난 대선에서 극우 성향 정당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에게 따라 잡힐 뻔했던 경험이 뼈아팠을 것이다. 인터뷰에서 마크롱은 소셜 미디어와 디지털 기술로 인해 유럽의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소셜 미디어가 분노와 불만을 증폭시키고, 이것이 다시 사회 전반의 양극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민족주의, 포퓰리즘, 극우 성향의 정당들이 유럽 대륙에서 약진하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마크롱의 주장이 필요한 만큼 힘을 갖지 못하는 까닭이 정말 소셜 미디어에 있는지는 돌아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좌파가 경제적 진보가 아닌 문화적 진보 정치로의 전환을 통해 노동자 계급을 포기했다고 지적한다. 극우 정당의 주요 지지자가 누구인지를 보면, 피케티의 결론에 수긍하게 된다.

IT MATTERS

마크롱이 EU 안에서 먼저 풀어야 할 것은 독일과의 관계다. 당장 R&D 예산 증가나 규제 완화와 같은 제안에 독일의 반응은 미온적이다. 유럽의 안보와 러시아에 대한 대응에 관해서는 마크롱 대통령과 독일의 숄츠 총리가 대놓고 얼굴을 붉혔다. 독일은 안보를 미국에 기대고 경제적으로 중국과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마크롱은 반대다. 유럽의 안보 독립을 주장하고 중국과의 교역에서 상호주의(reciprocity)의 원칙을 강조하며 중국으로부터 유럽 시장을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독일 숄츠 총리와의 만남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던 시진핑 주석이, 마크롱과의 정상회담장에서는 그럴 수 없었던 이유다.

마크롱은 인기 있는 정치인이 아니다. 등장은 참신하고 젊었지만, 그뿐이었다. 마크롱은 임기 내내 프랑스 국민의 거센 시위와 저항에 맞서 왔다. 유류세 인상으로 촉발된 2018년의 노란 조끼 운동, 연금 수령 연령 상향 조정에 따른 2023년의 연금 개혁 시위가 대표적이다.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이민자 소년으로 촉발된 분노, 이러다간 죽겠다며 트랙터를 몰고 파리를 향한 농부들의 함성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마크롱은 야망이 있는 정치인이다. 20년 만에 재선에 성공한 프랑스 대통령이며, 포스트 메르켈 시대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겠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지키고 머무르는 유럽의 습관을, 이 젊은 대통령이 바꿀 수 있을까. 만약 성공한다면 한국은 미국 우선주의에 이어 유럽 우선주의에도 대응해야 한다. 미국이 혼자 질주하는 게임에서 미국과 유럽이 같이 질주하는 게임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주춤하는 사이 일본이 먼저 변화했다. 이제 유럽도 그 변화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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