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20일, 안보 전략 수정보다 예측 불가한 사건이 있었다. ‘아베노믹스’로 대표되는 일본의 인위적 엔저 정책의
수정이다. 아베 전 총리가 비둘기파였던 구로다 하루히코를 일본 은행(BOJ) 총재로 임명하며 지금까지 유지한 정책이 바뀐 것이다. 일본의 위기감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 아베노믹스 ; 일본은 침체된 경기와 디플레이션을 부양하기 위해 정부에서 국채를 끝없이 찍고 중앙은행이 매입해 유동성을 공급했다. 초저금리를 유지한 탓에 수출 경쟁력은 높아졌으나 국채 매입의 부작용으로 정부 부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북저널리즘 종이책 《일본, 위험한 레트로》에 따르면 일본의 부채는 2022년 기준 1017조 엔으로 우리 돈 약 1경 원에 이른다.
- 인플레이션 ; 코로나19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플레이션이 찾아오고 기록적 엔저가 찾아오며 아베노믹스는 위기를 맞았다. 주요 국들이 금리를 인상하며 금리 격차도 커져 외화 유출 우려도 더해졌다. 3.6퍼센트나 오른 물가를 잡으려면 금리 인상을 해야 하는데 금리를 높이면 국채 이자도 같이 늘어버리는 악순환이 온다. 오건영 신한은행 WM그룹 부부장은 이를 “물가로 맞을래, 금리 올려서 부채로 맞을래?”의 선택이라 표현한다.
- 금리 인상 ; 일본은 미국 정부채를 팔며 엔화를 매입하여 일시적 효과를 거뒀으나 엔화 폭락은 지속됐다. 결국 일본은 단기 금리는 놔둔 채로 10년물 국채 금리의 변동폭을 소폭 확대했다. BOJ는 금리 인상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시장은 사실상 금리 인상으로 본다.
INSIGHT_ 아베의 형해화
아베라는 일본 정치의 거물은 대외적으로 일본 제국의 부활을, 대내적으로는 인위적 양적 완화를 대표했다. 그가 사망한 후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아베의 그림자와 씨름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베를 반쯤 계승한 듯 전수방위 개념을 형해화하는 한편 물가를 잡으려는 그의 노력은 낮은 지지율과 연관돼 있다. 금리 인상은 대기업 수출 주도의 경제 정책을 분배 위주로 전환하고자 하는 기시다표 ‘신자본주의’ 노선의 일환이다. 기시다 내각은 아베노믹스 시기처럼 여전히 기업에 임금 인상을
압박하고 저축보다 투자를 권유하는 등의 청사진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임금의 물꼬를 터줄 하청 구조 개혁은 요원하고 그나마 활성화한 투자는 외환 시장을 향한다. 만성적 경기 침체의 뾰족한 해답이 없는 상황에서 군비 증강을 외치는 모습은 국내적 위기를 국외 환경으로 돌리려는 과거의 문법과도 닮아 있다. 기시다의 일본은 아베의 껍데기 속에서 새롭게 부화하기에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을 지체했다.
STRATEGY_ 라피더스
일본의 묘수는 뭘까? 기시다 내각의 야심은 주로 하드 파워에서 드러난다. 안보 전략 개정과 동시에 대만과의 반도체 밀월도 강화하고 있다.
- TSMC 공장 유치 ; TSMC는 일본 구마모토현에 1조 2000억 엔 규모의 생산 라인을 건설 중이며 일본 정부가 이 건설 비용의 40퍼센트를 지원한다. 일본은 지진이 자주 나서 키오시아 같은 일본 반도체 기업도 자주 생산 라인이 멈춘다. 그럼에도 TSMC가 일본에 생산 공정 확대에 나서는 배후에는 애플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애플의 속내 ; 애플의 주요 부품은 대만 폭스콘이 만들고 아이폰의 AP는 TSMC가 만들며, 이미지 센서는 일본의 소니가 만든다. 소니의 이미지 센서 핵심 칩은 TSMC가 만든다. 애플의 생산 다변화 요구에 TSMC는 일본, 미국, 독일 등으로 생산 공장을 확대하고 있고 일본은 이 기회를 적극 이용하려 한다.
- 라피더스 ; 도요타와 키오시아, NTT, 소프트뱅크, NEC 등은 ‘라피더스(Rapidus)’라는 이름의 공동 기업을 설립했다. 미국 IBM의 협조 아래 일본 정부가 700억 엔을 지원해 2027년까지 2나노 반도체를 생산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반도체 드림팀이다. 그럼에도 문제로 거론되는 것은 기술자의 부족이다. 이미 벌어진 격차를 메워줄 기술자가 없다.
FORESIGHT_ 제국 시민은 없다
일본은 제국의 부활을 알릴 수 있을까? 초고령 사회로 접어든 인구 구조와 세계 1위의 국가 부채 비율은 일본을 경제 대국에서 끌어내리고 있다. JP모건과 골드만삭스 등 세계 유명 투자 은행들은 일본의 내리막을 점치고
있다.
- 국가주의적 사고를 전제하면 고령화는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엔저와 함께했을 때 그 문제점이 배가된다. 니혼게이자이신문 계열 경제 연구소인 일본경제연구센터는 현재처럼 실질 임금이 오르지 않을 경우 “2030~2032년 쯤에는 동남아 외국인 근로자들이 굳이 일본에 오지 않을 것”으로 봤다. 자국 내 임금이 일본의 50퍼센트 이상에 도달하는 시점을 의미한다. 고령화로 노동력이 부족한 일본에 치명적이다.
- 그렇다고 저출생의 해답이 뾰족한 것도 아니다. 일본은 올해 123년 만에 출생아 80만 명 선이 붕괴될 것으로 보인다. 75세 고령 인구의 건보료로 저출산 재원을 마련하려는 의견도 나온다. 지난 6월 개봉한 일본 영화 〈플랜 75〉는 75세 이상의 노인에게 자발적 안락사를 권유하는 내용의 영화이자 일본의 혹독한 현주소다. 인구 절벽을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제국 시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