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4일 윤석열 총장은
중대범죄수사청 설치를 반대하면서 검찰총장직을 사퇴합니다. 사퇴의 명분은
검수완박이었습니다.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하려는 정권의 검찰총장 역할을 더 이상은 할 수 없다는 논리였죠. 윤석열 총장은 문재인 정권의 검찰 제도 개혁 방향에 관해 처음엔 이견이 없었습니다.
인지수사 부서를 축소하고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는 것도 세계적인 추세라는 데 동의했었죠. 대한민국의 검사는 무시무시한 존재입니다. 검사가 범죄로 인지하면 범죄 내사가 시작됩니다. 내사를 하다 범죄다 싶으면 기소하고 수사로 전환합니다. 걸면 다 걸립니다. 걸어다니는 공권력이죠. 그래서 윤석열 총장은 기획 있을 때마다 최소한의 법집행을 강조해왔습니다. 인지수사가 가능하다 보니 검찰이 법을 확대 해석하면 물이 너무 맑아서 아무것도 살 수 없는 무시무시한 법가의 시대가 펼쳐질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합리적이었죠. 정작 검찰총장 윤석열의 사퇴 명분은 검수완박 반대였습니다. 자기 모순이었죠.
명분이야 상관 없었습니다. 진짜 챙길 실리는 대선 출마였으니까요. 이때부터 사실상 서초동 캠프가 꾸려졌습니다. 공식 캠프는 나중에 광화문 이마 빌딩에 생겼지만 서초동 캠프가 먼저였죠. 지금 서초동 캠프는 겉으론 장모와 아내 사건을 전담합니다. 사실상은 검찰 밖의 검찰총장실이나 다름없습니다. 월성원전 사건을 수사했던 검사와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을 수사했던 검사가 옷을 벗고 변호사 신분으로 합류해 있습니다. 윤석열 총장은 사퇴했지만 윤석열 검찰도 윤석열 사단도 해체되지 않았습니다.
윤석열 전 총장은
2021년 6월 29일 정치 참여를 선언합니다. 사실상의 대선 출마 선언이었죠. 대략 3개월 정도의 잠행을 끝낸 뒤였죠. 정치 참여와 대선 출마의 명분으로 윤석열 전 총장은 문재인 정권 심판과 정권 교체를 내세웠습니다. 이때 처음 윤석열 전 총장은 문재인 정부를 “부패하고 무능한 세력”이라고 규정합니다. “집권 연장으로 국민을 약탈하려고 한다”고 비판하죠. 심판과 단죄는 검찰의 언어입니다. 검찰은 과거를 바로잡는 기관입니다. 정치는 미래를 바로 세우는 행위입니다. 정치인 윤석열은 검찰의 언어로 정치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한계였죠. 시간이 필요한 문제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11월 5일
대선 후보 수락 연설도 사실상 지난 6월 29일 정치 참여 선언문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문재인 정권은 부패하고 무능하다. 내가 정권을 교체하겠다. 심판하겠다. 단죄하겠다.
“국민통합의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대한민국 성장엔진을 다시 가동하겠습니다. 복지 국가를 만들겠습니다. 문화 강국을 만들겠습니다. 창의성 교육을 강화하겠습니다. 든든한 안보 체제를 구축하겠습니다.” 윤석열 후보의 약속들입니다. 공정과 상식을 강조했어도 아무리 공정하게 말해도 상식적인 수준의 메시지들입니다. 결국 공정하고 상식적이지 못한 문재인 정부를 단죄하고 심판하기 위해 내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바꿔 말하면 이렇게도 읽힙니다. 윤석열 총장은 수사팀장으로 이명박 정부를 수사했습니다. 서울중앙지검장으로서 박근혜 정부를 단죄했습니다. 대통령 후보 검찰총장으로서 문재인 정부를 심판하려고 합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대통령이 된다면 수사와 단죄와 심판을 위해 대통령까지 된 전무후무한 특수부 검사가 되는 셈입니다.
윤석열 후보는 3월 공직을 떠나고 6월 정치에 참여한 이후 11월 5일 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될 때까지 윤석열 시대를 대변할 만한 상징적인 정책을 거의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엔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비전이 없습니다. 이쯤 되면 준비가 덜됐다거나 시간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비전은 정권 교체와 정권 단죄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정권 교체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윤석열 후보가 제시한 집권의 목적은 아직 그것뿐입니다. 이른바 구국의 결단입니다. 전두환 신군부도
구국의 결단을 말했었습니다. 본질은 권력욕과 생존욕의 결합이었죠.
그래서 6월부터 지금까지 지난 4개월 동안 윤석열 후보는 사실상 입만 열면 지지율을 깎아먹었던 겁니다.
준비된 정치인은 말실수가 적고 메시지가 선명합니다. 어떤 질문이 들어와도 확고한 가치관에 따라 답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 입으로 두 말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윤석열 후보는 정치인으로서 대중의 언어를 쓰도록 훈련받거나 단련되지도 못했습니다. 홍준표 후보한테 국민 여론 조사에서 10퍼센트포인트 차이까지 뒤처진 이유입니다. 홍준표 후보는 복잡한 사안을 대중의 언어로 간결하게 정리하는 데 도사입니다.
홍카콜라라는 별명은 그냥 나온 얻은 게 아니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도 비슷한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에 윤석열 후보는 다변가입니다. 다변가한테 중요한 건 말의 문장이 아니라 말의 문맥이죠. 그러다 보니 말을 잘라 들으면 말실수가 되기 일쑤입니다. 대통령 권력의 요체는 말입니다. 대통령은 숨소리조차 정치적입니다. 말 한마디가 국민들한테 위로가 될 수도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윤석열은
반사체다. 여권의 정치인들이 윤석열 현상을 폄훼하면서 하던 말입니다.실제로 정치 데뷔 이후 윤석열 후보는 자체 발광을 할 때마다 표를 잃었습니다. 급기야 국민의힘 경선 막판엔 후보가 말을 줄여야 한다는 얘기마저 캠프에서 나올 정도였죠. 그런데도
SNL에 나가서 사고를 쳤죠. 경선은
개판이었습니다.
사과를 개한테 줬습니다. 식용개와 애완견이 따로 있다고 말하고 그걸 물고 늘어지다가
투견판이 됐습니다. 결론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야당 경선에
연막탄을 터뜨린 꼴이 됐습니다. 국민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는 홍준표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윤석열의 싸움은 어차피 윤석열이 홍준표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본선에서도 구도는 똑같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주장하는 검사 윤석열과 국민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골라 하는 정치인 이재명의 싸움입니다.
심판자 윤석열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