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티켓, 유령 관객

2023년 8월 29일, explained

한국 영화계의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관객도 제작사도 극장도 실패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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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영화’ 타이틀이 사라질 전망이다. 최근 불거진 관객 수 조작 혐의에 대한 경찰 수사가 압수 수색은 물론 검찰 송치로까지 이어지자, 흥행 지표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KOBIS(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를 운영하는 영화진흥위원회에 박스오피스 집계방식을 관객 수 중심에서 매출액 중심으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WHY NOW

당국의 수사를 놓고 여러 목소리가 나온다. 코로나19로 부진을 면치 못했던 영화계에 갑자기 칼을 들이댄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도, 업계의 현실을 외면한 처사라는 볼멘소리도 있다. 또, 관객 수 기준의 박스오피스가 영화의 실제 수익성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숫자 뒤에 있다. 실패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버린 한국 영화계가 앞으로도 관객을 매혹할 수 있을지, 자문해야 할 시간이다.

조작 혹은 관행

유령이 극장을 떠돈다. 분명, 전석 매진을 기록했는데 상영관 안에 관객이 없다.  이른바 ‘유령 상영’이다. 주로 배급사가 초대권이나 이벤트성 티켓을 뿌린 후 실제 사용되지 않은 표를 심야 시간대에 발권 처리하면서 관객 없는 상영이 이루어진다. 업계 용어로는 표를 ‘태우는’ 것이다. 정부는 이를 ‘조작’이라고 말한다. 관객 수를 부풀려 박스오피스 순위를 교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계는 이를 ‘관행’이라고 말한다.

반부패공공범죄의 정의

전산상의 머릿수와 객석의 머릿수가 다르니 이상하다. 관객 수로 흥행을 판가름내는 영화판에서 유령의 존재는 ‘공정’에서 벗어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유령도 관객으로 셈해 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 영화계의 설명이다. 최근 독립영화나 다큐멘터리 영화 등 저예산영화의 경우 크라우드 펀딩 등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펀딩에 참여한 사람에게는 관례적으로 예매 티켓을 제공하지만, 참가자 모두가 극장에 오는 것은 아니다. 다큐멘터리 영화〈그대가 조국〉의 경우 펀딩을 통해 25억 원의 사전 매출이 발생했다. 시사회 초대권으로는 5만여 장이다. 〈그대가 조국〉은 서울경찰청 반부패공공범죄수사대가 관객 수 부풀리기 혐의로 집중 조사를 벌인 영화 중 하나다.

유령이 아닌, 영혼 관객

정치인을 향한 팬덤만이 이런 현상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독립영화 제작사가 지금도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서 관객을 기다리는 중이다. 또, ‘마블’ 시리즈 등 스크린을 ‘먹어 치우는’ 대작들에 밀리는 작은 영화들을 지지하기 위한 움직임도 있다. 극장에 직접 갈 수는 없지만 티켓을 구매하는, 이른바 ‘영혼 보내기’ 활동이다. 2018년 개봉했던 〈미쓰백〉, 2019년 개봉작 〈걸캅스〉 등 여성 중심 영화들이 이런 흐름에 올라타 성과를 낸 바 있다.

밴드웨건 효과

다만, 지금까지의 관객 수 집계 ‘관행’은 개선할 필요가 있다. 돈으로 흥행을 살 수 있는 ‘구멍’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경험하기 전까지 그 품질을 가늠할 수 없다. 돈을 내고 상영관에 들어간 다음에야 나에게 만족스러운 작품인지 알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대중의 평가’는 흥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박스오피스 1위’라는 타이틀은 내 돈 15000원이 그만큼의 즐거움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돈이 돈을 불리듯, 흥행이 흥행을 부른다. 그렇다면 마케팅 비용을 들여 관객 없는 상영관을 ‘매진’시킬 만 하다. 자본력이 있는 대작이라면 더욱 그렇다. 개봉 초기, 배급사가 이벤트 티켓을 대량으로 풀어 표를 ‘태워’ 버리면 초기 흥행의 불씨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가 산업이 되기 위해

애당초 영진위의 KOBIS 시스템이 도입된 계기는 다름 아닌 영화 투자자들의 요구였다. 이전까지는 관객 수를 말 그대로 셌다. 그것도 많은 경우 두 명이 함께 셌다. 극장 측이 수입을 조작할까 봐 배급사에서도 사람을 보내 관객 수를 함께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충무로가 바뀌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 ‘백만 흥행 시대’가 열리며 판이 커졌던 것이다. 투기판이 아니라 투자판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영화 산업은 공식적인 단일 창구를 통해 관객 수와 매출을 집계하고 공개하게 된다. 2004년의 일이다. 〈태극기 휘날리며〉, 〈어린 신부〉, 〈말죽거리 잔혹사〉 등이 개봉한 해였다.

쌍천만의 한국 영화

시대는 변했고 흥행의 기준은 이제 백만이 아니라 ‘천만’이다. 언론이 발명한  ‘천만 배우’, ‘쌍천만 감독’이라는 타이틀이 투자의 새로운 조건이 되었다. 판은 더 커졌고 실패의 위험도 더 커진다. 불공정의 문제와는 관계없이, 영화 산업에 더 정교한 기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까닭이다.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매출액을 기준으로 한 흥행지표다. 대작 영화들이 ‘천만 신화’에 얽매여 무리한 마케팅 비용을 쓰는 등의 과열 경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 2D관과 4DX관, 아이맥스관 등의 티켓 가격이 천차만별인 현실에서 수익성 높은 영화를 골라낼 수 있는 지표로는 관객 수보다 매출액이 더 적합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빈익빈 부익부

다만, 매출액으로 지표를 바꾼다 하더라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티켓값이 비싼 아이맥스 영화의 경우 제작비가 비싸다. 그래서 할리우드에 유리하다. 우리나라 아이맥스 흥행 1위작은 2014년 작〈인터스텔라〉다. 제작비는 1억 6500만 달러로, 한화로 약 2천 180억 원이다. 이번 관객 수 조작 경찰 조사의 계기가 되었던 〈비상선언〉은 높은 제작비 때문에 마케팅에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작비는 300억 원이었다. 꼭 특수 상영관 이슈가 아니어도 돈은 필요하다. 출연료가 높은 흥행 배우를 섭외해야 투자가 더 들어온다. 투자가 더 들어와야 홍보 마케팅 비용을 쓸 수 있다. 그리고 그 비용은 멀티플렉스 스크린 점유율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덩치 큰 영화만 스크린에 걸리는 구조가 단단해진다.

IT MATTERS

올해 한국 독립영화판의 최대 흥행작은 〈다음 소희〉다. 제작비는 15억 원이었고, 11만 관객을 동원했다. 손익 분기점은 넘기지 못했다. 국제적으로 크게 인정받았다. 대형 배급사의 선택은 다른 문제였다. 500여 곳의 스크린으로 시작해 개봉 열흘 만에 스크린 수는 200여 곳으로, 개봉 20일 째는 100여 곳으로 주저앉았다. 재미가 보장된 영화들도 주저앉는 판에 〈다음 소희〉 같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무모하다. 매출액으로 순위를 매겨도, 관객 수로 순위를 매겨도, 어차피 관객에게는 소희가 보이지 않는다. 애써 찾아도 소희를 볼 스크린이 없었다.

최근 일본 독립영화계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후카다 코지, 하마구치 류스케, 미야케 쇼 등의 감독은 한국 관객에게도 이름을 알렸다. 비결은 일본 특유의 ‘미니 극장 문화’다. 멀티플렉스가 아닌, 작은 극장에서 개봉해 관객들을 만날 기회가 일본의 독립영화에게는 열려있는 것이다. 그 만남을 계기로 입소문을 타게 되면 배급망을 넓힐 수 있다. 유럽권의 투자를 받는 경우도 생긴다. 관객도, 극장도 실패할 준비가 되어 있다. ‘다른 영화’를 만나기 위한 비용이다.

정부는 영화계의 관행이 불공정이라고, 영진위의 업무를 ‘방해’했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실패해서는 안 되는 한국 영화계의 위험한 환경이 그 불공정한 관행을 만들었을지 모른다. 지표를 바꾼다면 유령이든 영혼이든 셀 수 없는 관객은 걸러낼 수 있겠지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책도, 업계 시스템도 영화는 산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영화는 산업인 동시에 문화다. 그래서 우리를 매혹한다. 〈다음 소희〉의 다음이 없다면, 투자자를 불안하게 하는 새로운 시도가 불가능하다면, 박스오피스 순위에서 한국 영화의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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