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의 방법을 바꾼 사람

2023년 10월 17일, explained

승부사, 구영배 대표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보따리상의 디지털화다.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NOW THIS

싱가포르 이커머스 기업 큐텐Qoo10이 11번가 인수에 나섰다. 업계에서 이른바 ‘설’이 돌기 시작한 것은 몇 달 전이지만, 양사 모두 관련 내용을 부인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다. 구체적인 인수 방식을 놓고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성사 전망은 밝다. 큐텐 측이 5000억 원의 현금을 투입하겠다며 나섰고, 11번가는 지금 현금이 필요하다.

WHY NOW

온라인 쇼핑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2005년에는 있었을 것이다. 2023년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커머스는 이제 IT업계의 사정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이다. 로켓배송과 SSG 배송, 샛별 배송은 이미 우리의 삶을 떠받치고 있다. 이 한복판에, 싱가포르에서 온 온라인 쇼핑몰 큐텐이 뛰어든다. 상점 하나가 새로 문을 여는 개념이 아니다. 우리 일상에 새로운 혁신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큐텐, 한국 시장 등판

국내 이커머스 시장, 그러니까 온라인 쇼핑 시장은 쿠팡과 네이버가 양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시장의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두 강자에게 2000년대, 2010년대를 풍미했던 플랫폼들은 밀려난 지 오래다. 그런데 최근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먼저 지난 2021년, 이마트가 옥션과 지마켓을 인수하면서 SSG닷컴이 기지개를 켰다. 단숨에 시장 3위로 올라섰다. 그런데 이 자리를 위협하는 플랫폼이 나타났다. 싱가포르에서 온 정체불명의 큐텐Qoo10이다. 지난해부터 티메파크(티몬, 위메프, 인터파크 쇼핑) 등을 사들이면서 세를 키웠다.

구영배, 금의환향?

미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싱가포르산 이커머스 플랫폼이라니 낯설다. 우리 시장이 싱가포르 회사에 먹히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큐텐의 정체를 뜯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싱가포르에서 온 큐텐의 대표가 바로 구영배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이다. 심지어 한국 이커머스의 전설이다. 전국의 ‘지하상가’ 옷 가게를 찾던 손님들을 온라인으로 끌어들였던 한국형 오픈 마켓의 시초, 지마켓의 창업자다. 인터파크 사내 벤처로 시작해 2006년 이커머스 업계 최초로 미국 나스닥 시장에 상장했다. IT 버블이 꺼진 이후 제대로 된 성공 신화를 쓴, 완결까지 낸 1세대다. 구영배는 2009년 지마켓을 이베이에 넘긴다. 그리고 14 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대체 그는 무슨 일을 벌여온 것일까.

지하상가를 G마켓으로, G마켓을 나스닥으로

구영배는 승부사다. 인터파크에 CFO로 자리 잡고 그가 맡았던 프로젝트는 ‘구스닥’이었다. 주식거래처럼 물건을 사고판다는 개념의, 일종의 경매 사이트였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투자를 받고자 미국으로 향했지만 일은 풀리지 않았다. 결국 구영배는 첫 번째 승부를 건다. 기존의 BM을 과감하게 폐기하고 지금의 오픈 마켓 모델로 전환한 것이다. 패션 카테고리를 중심으로 무섭게 성장했다. 이른바 동대문발 ‘보세 의류’를 온라인에서 싸고, 쉽고, 간편하게 구입할 수 있다는 점이 먹혔다. 그리고 회사가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 두 번째 승부수를 던진다. 이미 옥션을 인수하며 한국 시장에 진출한 이베이에게 G마켓을 넘긴 것이다. 그리고 곧 다음 도전을 시작한다.

보따리상의 오픈 마켓

이번에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국내에서는 이베이와의 겸업 금지 조약 때문에 이커머스 시장에 남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구영배가 새로운 승부처로 점 찍은 곳은 싱가포르였다. 동남아 국가 중 비교적 소득수준이 높은 곳이다. 그러나 온라인 쇼핑의 질은 소득수준만큼 높지 않았다. 동남아 국가라는 특성상 이커머스 시장에서 유통되는 상품 중 중국산이 압도적이었다. 당시 중국 제품의 강점은 가격이었다. 약점은 품질이었다. 구영배는 이베이와 손잡고 2010년 큐텐을 설립한다. 콘셉트는 역직구 플랫폼이었다. 한국의 제품을 싱가포르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플랫폼이다. 먹혔다. 큐텐은 빠르게 성장한다. 거래량 기준 싱가포르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물론이고 이후 일본, 중국, 홍콩 등지로 진출했다. 큐텐 재팬은 지난 2018년 이베이에 인수된다.

적자 기업을 골라 담는 이유

이렇게 잘나가는 큐텐을 앞세워 구영배 대표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만년 적자에 허덕이던 티몬, 위메프, 인터파크 쇼핑을 차례로 인수했다. 다음으로 넘보는 것은 11번가다. 국내 이커머스 시장에서 세를 확장하는 이번 행보가, 과연 구 대표의 네 번째 승부수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 사실, 아직 협상 중인 11번가를 제외하고 나면 ‘티메파크’의 시장 점유율은 쿠팡과 네이버에 비해 한참 뒤떨어지는 수준이다. 일각에서는 만년 적자 상태의 이들 플랫폼 인수가 과연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구 대표의 야망이 향해 있는 곳을 보면 납득이 간다. 구 대표가 네 번째 승부를 건 곳은 한국 시장이라기보다는 글로벌 풀필먼트라는 시장이다. 바로 큐텐의 자회사, ‘큐익스프레스’의 나스닥 상장이 구 대표의 다음 목표다.

온라인 쇼핑 3.0

G마켓은 2000년대, 지하상가의 옷 가게를 이커머스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큐텐은 2010년대, 보따리상을 이커머스로 끌어들였다. 그것만으로도 혁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오픈마켓 플랫폼이 제공하는 것은 매끈한 고객 경험이다. 개인이 운영하는 온라인 판매 업체로서는 제공할 수 없는, 프로모션에서 구매, CS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묶어낸다. 그런데 이 매끈한 고객 경험은 이미 당연한 기본값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경쟁력은 어디서 올까. 실제 물건을 받아보는 경험이 일어나는 단계, 배송이다. 중국 자본의 공세가 강했던 싱가포르에서 구 대표는 그 점을 명확하게 확인했다. 저가 물량, 공격적 프로모션에 계속해서 출혈 경쟁으로 맞받아쳐서는 승부가 나질 않는다. 그렇다면 혁신적인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그 해답이 바로 물류에 있었다. 그리고 역직구 플랫폼 큐텐의 정체성과 맞물려 큐익스프레스가 추구하는 것은 국가와 국가를 잇는, 직구의 경험을 더욱 쾌적하게 개선할 수 있는 글로벌 풀필먼트다.

전설이 던지는 네 번째 승부수

그렇다면 큐텐의 ‘티메파크’ 인수는 논리적인 선택이 된다. 물론 큐텐이 아니라 큐익스프레스를 위한 선택이다. 한국 제품을 해외에 내다 팔 역직구 셀러를 확보하는 동시에 국내 고정 물량까지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득이다. 또, 최근 국내 이커머스 업체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기업가치가 하락해 더더욱 이득이다. 11번가는 국내 이커머스 3위 업체다. 지마켓만큼이나 역사가 깊다. 견고한 셀러 풀을 확보하고 있단 얘기다. 또, 아마존과의 협력도 주목된다. 현재는 아마존의 해외직구 상품을 판매하는 데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역으로 11번가 셀러들이 아마존을 통해 해외 판매에 나서게 될 경우, 큐익스프레스로 물량을 가져간다면 만만치 않은 실적이 될 수 있다. 큐익스프레스는 최근 경기 이천에 전체면적 1만 평 규모의 물류센터 운영을 시작했다. 쿠팡과 네이버가 풀필먼트 대전을 벌이며 국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동안, 구영배 대표의 큐텐은 시장을 더 큼직하게 보고 다음 승부수를 두고 있다.

IT MATTERS

구 대표의 큰 그림이 어떤 모습일지, 짐작해 볼 수 있는 움직임은 이미 시작되었다. 티몬의 ‘Qx프라임’ 서비스 등이 그것이다. 셀러들에게 물류 업무를 종합 지원하는 풀필먼트 서비스다. 지금은 국내 배송 중심으로 물류 경쟁력을 확보하는 수준이지만, 큐익스프레스는 해외 수출을 기대하는 셀러들, 즉 역직구 보따리상을 정조준하고 있다.

역직구 물류에 강점이 있다는 얘기는 직구 물류에도 강하다는 얘기다. 어차피 글로벌 물류라는 점에 있어서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최근 아마존을 위협하고 있는 중국발 초저가 이커머스 기업들의 강세를 고려하면 큐텐 연합군이 밖으로는 역직구 셀러들을 활용하고 안으로는 더욱 편리해진 직구 시스템으로 저가 공세를 펼 가능성도 있다. 7, 80년대 중소 무역상사들이 하던 일이다.

큐텐 연합에 11번가까지 합세한다는 것은 우리 이커머스 시장의 제2막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11번가는 SK라는 대기업이 만든 오픈 마켓이다. 지난 2018년 5000억 원대의 투자를 받았다. 올해 9월에는 상장하겠다는 약속의 대가였다. 당시 기업 가치는 약 2조 7000억 원으로 평가받았다. 엔데믹과 고금리로 이커머스 시장에서 거품이 빠진 지금은 1조 원 가량이다. 기업 가치가 3분의 1토막 났다. 상장을 하려야 할 수 없는 상황이고, 투자자들에게 돈은 갚아야 한다. 뼈아픈 실패다. 각종 프로모션, 아마존과의 협력 등 의미 있는 시도는 있었지만 오픈 마켓의 본질에 질문을 던지는 혁신은 없었다. 그 사이 네이버와 쿠팡이 치고 올라왔다. 승부수를 던져야 할 이유는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 사실을 구영배 대표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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