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무지

2024년 1월 30일, explained

유럽의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도시로 향한다.

2024년 1월 26일, 농업용 경유 세금 인상에 반대하는 트랙터 시위대가 독일 연방 청사 근처에 정차해 있다. 사진: Christoph Soeder/picture alliance via Getty Images
NOW THIS

루브르 박물관의 상징,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또다시 수난을 당했다. 이번엔 호박수프를 뒤집어썼다. 물론 보호 유리 덕에 작품이 직접적으로 훼손되지는 않았다. 공격을 감행한 것은 ‘식량 반격(Riposte Alimentaire)’이라는 시민단체의 활동가들이다. 이들은 모나리자 앞에 서서 질문했다. “예술, 아니면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식량, 무엇이 더 중요한가? 농업 정책이 병들었다. 농민들은 일하다 죽어가고 있다.”

WHY NOW

이들의 행동이 과연 정당한지는 논의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들의 질문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적절하다. 루브르 박물관이 위치한 파리가 농민들의 분노로 봉쇄될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이 분노는 프랑스 농민들만의 것이 아니다. 온 유럽이 같은 분노에 휩싸여 있다. 이유는 유럽 국가들의 친환경 정책 때문이다. 곧 우리의 일이 될 문제다.

파리 봉쇄

지금 프랑스에서는 일주일 넘게 농민들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불씨가 된 것은 농업용 경유 면세 폐지 정책이다. 대기 오염의 주범 중의 하나인 경유 사용량을 줄이기 위한 조치로,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세금 혜택을 없앤다. 농민들은 분노했다. 프랑스의 주요 고속도로가 몰려든 트랙터로 막혔다. 부랴부랴 젊은 신임 총리가 나섰다. 농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책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농민들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제는 파리가 트랙터로 봉쇄될 위기에 처했다.

격하된 사람들

프랑스 정부는 당황하고 있다. 노란 조끼 시위의 악몽이 겹쳐 보인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터질 것이 터졌다는 반응이다. 이 시위는 단순히 기름값에 대한 불만으로 촉발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농부들에게 생산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물 없이 생산하라고, 별다른 대책도 없이 농약 같은 생산 수단 없이 생산하라고 요구합니다.” 프랑스 과채 무역 협회의 로랑 그랑딘 회장의 말이다. 정부 입장에서 친환경은 이제 이상적인 목표가 아니라 달성해야 할 현실이다. 그리고 정부가 내놓는 정책들은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경험과 무관하게 결정된다. 이 과정에서 농부들은 ‘격하된 느낌’을 받고 있다. 프랑스만의 문제는 아니다. 정확히 같은 이유로, 독일에서도 트랙터 시위가 벌어졌다. 불과 보름여 전의 일이다. 베를린이 트랙터 7천 대, 트럭 2천 대로 가득 찼다.

지원금은 엄청난데

유럽의 패권을 쥐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의 상황이 이렇게까지 치닫게 된 배경에는 유럽연합의 CAP(Common Agricultural Policy, 공동농업정책)가 있다. 유럽 대륙의 식량 주권을 보장하기 위해 1962년 시작되었다. 유럽 연합 지출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 2023년 CAP 예산은 537억 유로에 달했다. 현재 CAP의 지상 목표는 농민에 대한 소득 지원과 환경 보전이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요원하다.

CAP의 해결책

CAP의 농민 지원은 기본적으로 토지 면적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변화에 취약한 소농보다는 대지주에게, 그리고 기업형 농업에 유리하다. 환경 보전에 관한 지원책은 지원금을 빌미로 한 규제에 기댄다. 경작지의 4퍼센트를 놀려 땅을 쉬게 해야 한다. 농약 사용을 절반 이하로 줄여야 한다. 초원을 보존하고 이탄 습지 또한 훼손해서는 안 된다. 모두 좋은 얘기다. 다만, 농민에게 의무는 지우고 방법은 제시하지 않는다.

손에 흙을 묻혀야 알 수 있는 것들

서류 위에서 친환경은 간단하다. 몇 줄의 대책과 명료한 도표로 달성 가능한 수치가 산출된다. 현장에선 복잡하다. 농약을 쓰지 않는 유기농은 모두를 위해 좋다. 그러나 수고가 든다. 농부는 유기농 곡물을 재배하기 위해 경유로 달리는 트랙터를 더 자주 몰고 밭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서 농업용 경유 면세 폐지는 단순한 기름값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럽 전역이 공통으로 겪고 있다. 대부분의 유럽 특파원이 주재하는 프랑스 파리를 벗어나도 트랙터는 있다. 그리고 그 트랙터들은 각자의 경적을 울린다.

세계 평화의 허울

지난 24일, 폴란드에서도 농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에서도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때문이다. 전쟁 발발 이후, 흑해 항로가 막힌 우크라이나의 농산물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동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생물 다양성을 위해 농지를 놀릴 필요도 없고, 농약도 예전처럼 쓴다. 동유럽의 농부들은 ‘불공정 경쟁’에 내몰렸다고 이야기한다. 토양까지 비옥해 가격이 싸다. 유럽에만 적용되는 룰을 다 지키며 농사를 지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단 얘기다

BBB

농축산물 수출 강국 네덜란드에서는 농민들의 분노가 정권도 바꿨다. 네덜란드의 집약적 축산업은 효율 면에서 막강한 경쟁력을 자랑했지만 환경 파괴에서까지 막강했다. 가축 배설물 때문에 국립공원이 생물다양성 위기에 직면했고 달팽이의 껍데기가 형성되지 않는 현상 등이 관찰된 것이다. 결국, 정부가 농장을 사들여 폐쇄하겠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유럽연합의 기후 위기 대책에 따라 2030년까지 질소 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여야 하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다. 농심이 폭발했다. 농민들의 항의 운동 과정에서 ‘BBB(농민시민운동)’라는 정당이 탄생했고, BBB에 연정을 제안한 극우 성향의 자유당이 지난 2023년 11월 치러진 총선에서 압승했다.

IT MATTERS

시민의 분노는 누군가에겐 정치적 기회가 된다. 루이스 플라나스 스페인 농수산식품부 장관은 “극우파가 농민들을 정치적 지렛대로 이용하려 하고 있다”며 직접적인 우려를 나타냈다. 독일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우려는 제기된다.

농부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무지한 것은 정책 결정자들이다. 기후 위기의 책임을 농업에 지우려 들지만, 기후 위기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섹터는 바로 농업이다. 산업혁명으로 부를 축적한 것은 서구 사회인데, 기후 재난의 피해는 남반구에서 뒤집어쓴 현실과 겹쳐 보인다. 정치는 농업의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농부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지 않으니, 경적을 울리고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큰 그림은 보이지 않고 정책들은 산만하다. 연구는 정부가 하고, 시행은 농촌에서 하는 그림이 유럽 판박이다. 전 사회적인 변화 요구에 직면한 지금, 도시의 무지는 우리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의 일성이 크게 울린다. “한 명의 시민이 두 명의 농민과 친해지는 도농 교류가 필요하다”는, 도시와 농촌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는 한 기후 위기와 먹거리 문제를 돌파할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동화 같지만,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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