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유전병 환자를 살리느라 민족 공동체가 6만 제국 마르크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민족 동지여, 이것은 당신의 돈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민족을 구성합시다.”
사람에 ‘쓸모’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순간 우리는 인간성을 잃어버린다. 나치는 ‘안락사 프로그램’(Aktion T4)’이라는 이름 아래 30만 명의 장애인을 학살했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바로 다음 해부터 40만 명 이상이 유전병 등을 이유로 강제 불임 시술을 받았다. 인간이 ‘잉여’ 할 수 있다는 발상이 권력에 의해 공식화되는 순간, 학살은 집단을 위한 효율이 되고 희생은 각자도생하지 못한 무능력이 된다.
CONFLICT_ 합법적이며 민주적인
유럽이나 미국의 입장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다. 서구 사회 대부분이 유대인에 대한 반감에 동조한 일이 있으며 지금도 그 잔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반유대주의는 그래서 일종의 지우고 싶은 죄책감인 동시에 가능하다면 언급하고 싶지 않은 가시 같은 것이 되었다. 매체들이 히틀러와 나치의 시대를 집단 광기에 해당하는 어떤 것으로 그리는 이유다. 당시는 이성을 상실한 예외적인 시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우리와는 관계없는, 이성적인 우리라면 결코 하지 않을 선택처럼 포장하는 것이다. 왜곡이다. 나치 정권은 독일 국민이 투표를 통해 선출한 정권이다. 합법적이며 민주적인 절차를 밟았다. 나치당은 대중 정당이었고 히틀러는 대중 정치인이었다. 유대인 말살 정책을 펴나가는 과정은 몹시 차분했다.
제노사이드의 10단계를 차근차근 밟아 나아가며 전적으로 민심의 지지에 의지했다.
DEFINITION_ genocide
제노사이드(genocide)란 ‘인종’이라는 뜻의 ‘genos’와 ‘죽이다’라는 뜻의 ‘cide’가 합쳐진 단어로, 1943년 폴란드계 유대인 변호사 라파엘 렘킨이 만들었다. 1948년 12월 유엔 제노사이드 협약이 채택되면서 국제법의 범죄 개념으로 정립되었다. 하나의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 등을 파괴할 목적으로 수행되는 모든 행동을 지칭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종을 멸종시키는 이 엄청난 악행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 타자화, 상징화, 차별 ; 혐오의 대상을 ‘우리’로부터 분리하고 편견을 만드는 과정이다. ‘이대남’과 같은 용어부터 시작해서 ‘한남’, ‘김치녀’, ‘검머외’ 등 혐오를 내포하고 있는 용어들에 이 과정이 응축되어 있다. 위험한 업무를 외주 용역업체로 돌리는 외주화의 관행도 넓은 의미의 타자화라고 할 수 있다. 나치는 독일 사회에 퍼져있던, 유대인은 일하지 않는 고리대금업자이며 사회주의자라는 반감을 십분 활용하여 유대인을 동료 시민에서 탈락시키고 차별의 근거를 마련했다. 1935년 통과된 인종차별법이 그것이다.
- 비인간화, 조직화, 양극화 ; 혐오를 되돌릴 수 없게 된다. 혐오의 대상을 인간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과정이다. 냉전 시대 선전물에서 공산주의 국가의 군인들이 종종 늑대로 묘사되었던 경우가 좋은 예다. 때로는 해당하는 집단을 향해 ‘떼를 쓴다’는 식의 용어를 사용해 대등한 논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존재로 만들기도 하고, 교육 과정에서 그들의 이름을 지우기도 한다. 나치는 유대인을 쥐나 해충 등에 비유했다. 초중고 교육과정에는 ‘인종학’ 수업이 개설되었다. 이렇게 타깃의 인간성을 삭제하고 나면 다음 단계는 신속하게 진행된다. 증오 집단이 조직되고 이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혐오의 크기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 준비, 박해, 몰살 ; 실행단계다. 학살을 위한 목록이 작성되고 희생자들은 분리되어 추방되며 재산을 몰수당한다. 나치의 절멸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는 300만 명이 넘는다.
- 부정 ; 그리고 가해자 또는 후세대가 이러한 범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제노사이드의 마지막 단계다.
당시 독일에는 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인간을 효용으로 계산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미국에서, 유럽에서 감지되는 ‘반유대주의’로부터 우리도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이유다.
INSIGHT_ 혐오할 권리
그런데 언제나 혐오를 경계하는 시선에 따라붙는 것이 있다. ‘혐오할 만하지 않으냐’는 질문이다. 유대인을 미워하는 마음이, 지금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보고도 과연 나쁘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 같은 것 말이다. 나쁘다. 부조리의 원인을 따지고 책임자를 가려내어 비판하는 성의를 들이지 않고 하나의 집단을 통째로 뭉뚱그려 혐오의 기재로 몰아넣는다면 나쁘다. 이 세상에 어떠한 집단도 완벽하게 선하거나 악할 수 없다.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의 스펙트럼이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우리 중 누구도 완벽한 가해자나 피해자는 없다. 우리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애자지만 소수민족이며, 부유하지만 장애를 갖고 있으며, 백인 남성이지만 정신 질환이 있다. 우리는 그런 존재다. 그래서 우리 중 그 누구도,
혐오할 권리는 없다.
FORESIGHT_ 다시, 악의 평범성
얼마 전 독일에서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제국시민(Reichsbürger)’이라는 단체다. 인종 차별과 반유대주의 사상을 가진 극우 세력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 연합국이 독일을 비밀리에 통치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믿고 있다. 현직 판사와 군인까지 가담해 독일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독일 뿐만이 아니다. 극단으로 치닫는 경제 상황 앞에서 전 세계에서는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우는 극우 정치세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혐오의 힘이 세지고 있다. 그 힘은 우리를 유혹한다. 특정 집단에 희생을 강요하고, 비난하는 간편한 방법으로 지금의 위기를 회피하고자 하는 유혹 말이다. 한나 아렌트는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저 엄청난 절대악의 현상은 평범성, 즉 생각하기의 무능, 말하기의 무능, 판단하기의 무능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인류가, 또다시 무능해질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