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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젊은 공무원들이 스타트업으로 이직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2022년에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공무원은 2020년의 네 배로 30퍼센트에
육박했다. 같은 기간 공무원에서 대기업으로의 이직 비율이 34퍼센트인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 수치다. 전체적으로 30대의 이직률이 높았고 스타트업으로의 이직은 해당 2년간 아홉 배 증가했다. 스타트업 취업을 희망하는 대졸자가 2퍼센트라는 다른 설문 조사와는 대조적이다.
WHY NOW
일본 정부 역시 스타트업을 국가 성장 동력으로 지정해 전폭 지원 중이다. 그런데 대중적으로 알려진 스타트업은 없다. 일본 스타트업 중 시가 총액 1위인
프리퍼드네트웍스(Preferred Networks)조차 국내 언론에서 보도량이 미미하다. 왜일까? 공무원과 대졸자가 보이는 온도 차는 그간 일본 스타트업계가 겪은 난맥상과 연결돼 있다. 이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일본이 당면한 과제와 미래가 읽힌다. 일본은 한국, 대만, 싱가포르와 같은 스타트업 강국이 될 수 있을까?
졸업자에서 이직자로
일본인 대학생 A 씨는 올해 졸업 전 무조건 대기업 취업을 노려야 한다. 졸업 후 ‘기졸(既卒)’이 되면 대기업 취업은 물 건너가기 때문이다. 차선책은 있다. 일본의 중소기업은 대기업과 연봉 차이가 크지 않다. 성과 중심으로 빠른 승진이 보장되진 않지만 종신 고용 문화가 남아있어 안정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공무원도 좋은 옵션이다. 대졸자가 스타트업 취업을 잘 고려하지 않는 이유다. 그렇게 공무원이 된 A 씨는 서른에 접어들며 점차 관료주의에 환멸을 느낀다. 사회 문제는 늘어나는데 조직은 혁신을 등한시한다. A 씨는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결심한다.
스타트업을 향한 동상이몽
일본 산업협회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공무원의 80퍼센트는 이직을 희망하는 이유로 ‘기업의 사회적 사명’을 꼽았다. 공무원의 낮은 임금과 잦은 초과 근무 외에도 사회 문제나 기후 문제 해결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이들을 스타트업으로 이끄는 것이다. 정의는 다양하지만 스타트업의 공통 정서는 ‘문제 해결’과 ‘도전’이다. 미래 세대는 일본이 잃어버린 해답을 스타트업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일본 정계와 재계가 스타트업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다. 이들에게 스타트업 육성은 장기 침체와 저성장을 해결할 기시다표 ‘신자본주의’의 핵심이다.
94개 모자른 유니콘
기시다 정부가 지난해 발표한 목표는 2027년까지 스타트업에 투자금을 열 배 늘리고 유니콘 기업을 100개 만드는
것이다. 실제 일본은 세계 스타트업 투자 시장이 말라붙는 와중에도 은행, 기관, 해외 자본의 스타트업 투자가
늘었다. 2022년 총 투자 규모가 8조 원인데, 한국의 11조 원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문제는 기시다 정부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앞으로 94개의 유니콘을 더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글로벌 시장 조사 기관 CB인사이츠의 유니콘 트래커 기준, 미국의 유니콘은 656개, 중국 171개, 일본 6개, 한국 14개, 브라질 16개, 멕시코는
8개다. 세계 경제 규모 3위에 걸맞지 않는 숫자다.
일본엔 카카오가 없다
숫자도 숫자지만 분야도 독특하다. 한국의 주요 스타트업은 사람들 일상에 스며든 IT 기반 플랫폼 비즈니스다. 반면 일본은 지역 기반 뉴스 큐레이션 플랫폼인 스마트뉴스 등을 제외하면 고객 접점이 없는 스타트업이
많다. 프리퍼드네트웍스는 AI 기업이고, 그 외 블록체인 핀테크, 소재 관련 스타트업이 뜨겁다. IT 기업은 주로 대기업의 외주 개발에 그친다. 왜 일본엔 카카오 같은 곳이 생기지 못했을까?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이다. 일본은 2015년 아베 총리의 실리콘밸리 방문을 기점으로 스타트업 투자가 크게 늘었다. 2016년 가상 화폐 붐이 일자 일본은 IT 산업에서 놓친 주도권을 웹 3.0에서 만회하고자 각종 규제를 풀고 스타트업 육성을 지원했다. 일본이 강점을 가진 소재·장비 분야도 이때 힘을 받았다. 지금의 유니콘은 이때의 산물인 것이다.
위험 회피 성향
지금은 투자 규모도 늘고 국가나 지자체에서 스타트업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일본은 여전히 스타트업 불모지를 벗어나지 못할까? 그 이유엔 일본 비즈니스 문화의 고질병이 있다. 스타트업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 기본이다. 반면 일본의 비즈니스 문화는 위험 회피 성향이 강하다. 특히 비즈니스 주체 간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실패나 실례는 용납되지 않는 신중한 문화다. 이는 신생 기업의 탄생과 시장 침투를 막고 투자 시장을 경색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자본은 장기적인 수익을 보고 여기저기 투자하고, 창업자는 신속한 의사 결정을 기반으로 시행착오와 개선, 피벗(pivot), 엑시트(exit)를 해내는 실리콘밸리와는 정반대의 문화다. 이 때문에 일본의 주요 벤처캐피털(VC)들은 그간 해외 기업에 주로 투자해 왔다. 소프트뱅크의 비전펀드 아래 한국 유니콘이 여럿 탄생하기도 했다.
안전망 없는 두려움
일본은 계속 혁신을 꿈꿀 수 있을까? 글로벌 통계 업체 스태티스타(statista)에서 ‘실패가 두려워 창업을 망설이는 비율’을 보면 2022년 기준 한국은 18.3퍼센트, 일본은
50.9퍼센트다. 일본 벤처기업센터(VEC)의 2020년 백서에 따르면 이 같은 두려움은 창업이 힘든 이유 1위로 꼽혔다. 기졸을 ‘인생종료(人生終了)’라 자조하는 취업 문화와도 닮았다. 다른 나라에 비해 고용 안정성이 높아 오히려 실패자에 대한 낙인은 더 강해진다. 게다가 비슷한 경제 규모의 선진국들에 비해 멘토나 액셀러레이터, 산학 연계도 부실한데 IT 인재의 수도 적다. 위험을 감수하며 창업이나 스타트업 시장에 뛰어들 동인이 더 적은 것이다. 공직 사회에서 스타트업에 뛰어든 이들이 ’미션‘을 주요 이직 사유로 꼽은 것의 진정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재패니즈 실리콘밸리
그럼에도 일본에는 여전히 스타트업이 필요하다. 비단 부가 가치가 높은 성장 동력으로서의 스타트업이 아닌 레트로의 때를 벗겨 낼 혁신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와 철저히 다른 사회 문화를 가졌지만 무엇보다 실리콘밸리식 모델을 적용해야 할 이유도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스타트업의 55퍼센트는 이민자의 창업이었다. 만성적 저출생과 인구 부족으로 이민자 유치에 한창인 일본에는 더없는 기회다. 실제 일본의 소도시인 이즈모(出雲)시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갈 곳을 잃은 동유럽 IT 인재를 대거 유치해 화제가
됐다. 민관 합작 기관 ‘피플 클라우드’를 통해 6개월간 비대면 일본어 강의를 제공 후 채용 면담을 진행하고 일본 현지의 채용과 이주·정착까지 종합 지원하는 솔루션이다. 러시아와 벨라루스에 등에서 100명 이상이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IT MATTERS
일본은 신자유주의를 향한 뒤늦은 출발을 했다. 익숙한 많은 것을 고치며 체질 개선에 나서는 과정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폐쇄적인 사회 문화도, 실패에 민감한 기업 문화도, 등한시했던 IT 인재 양성도 동시에 이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 여정의 중심에 자리한 스타트업을 바라보는 청년과 사회 지도층의 관점 차이가 절묘한 합의를 이룬 상태가 지금의 스타트업 붐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국가 시스템과 문화 자체를 혁신해야 하는 국가적 스타트업 상태라 볼 수 있다.
스타트업은 신속한 의사 결정으로 창업에 뛰어들어 최소 기능 제품(MVP·Minimum Viable Product)을 시장에 내보이고 피드백을 통해 시행착오와 개선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시장의 최종 선택을 받는 건 극소수다. 장인정신과 꼼꼼함으로 무장한 일본의 산업적 특성과 맞지 않는 방식이지만 이러한 ‘
린 스타트업(lean startup)’ 방식의 힌트를 줬던 건 다름 아닌 도요타였다. 그러나 스타트업은 성장주의가 유효했던 시절의 방법론이다. 높은 레버리지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가 이를 버틸 체력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중요한 건 혁신의 층위다. 정부와 기업이 원하는 경제적 체질 개선만큼 시급한 것은 일본의 만성적 사회 문제다. 야당이 설 자릴 잃어버린 정치 구조 아래 시급하게 다뤄져야 할 기후와 다양성, 복지, 보건의 문제는 시민 단체와 지자체의 몫이 된 지 오래다. 독선적이고 관료주의적인 공직을 경험한 이들이 스타트업에 뛰어드는 이유를 상기해야 한다. 어떤 혁신을 이룰 것인지 심도 있게 논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스타트업 붐은 잃어버린 40년이 돼 돌아올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