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만드는 완벽한 밸런타인데이

2024년 2월 14일, explained

관계의 경로는 이미 바뀌었다. 인공지능은 편리한 내비게이션일 뿐이다.

이미지 생성: Adobe Firefly, 프롬프트 입력: 김혜림
NOW THIS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한 남성이 데이팅 앱 ‘틴더’와 오픈AI의 챗GPT를 통해 5000명 이상의 여성과 대화, 한 명의 여성과 결혼에 골인하게 됐다. 그는 틴더에서 ‘좋아요’를 보내고, 메시지를 보내고, 데이트를 하는 데 몇 시간을 소요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며 오픈AI의 GPT-2를 데이트 도우미로 프로그래밍했다고 밝혔다.

WHY NOW

관계를 쌓는 정도(正道)가 바뀌었다.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고, 저렴하게 관계를 맺는 것이 미덕이 된 시대다. AI는 그 관계의 지름길을 가장 잘 찾아 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젊은 세대가 원하는 관계 맺기 방식, 인연의 부담감을 파악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소개팅이 열려도 지속 가능한 관계는 늘지 않는다.

데이트 도우미

챗GPT와 틴더를 사용해 결혼하게 된 알렉산드르 자단(Aleksandr Zhadan)은 프로그래머다. 자단은 그 자신의 관심사를 이해하고, 말투를 따라하며, 구글 캘린더와 연동해 직접 데이트 일정을 잡을 수 있는 데이트 도우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해당 프로그램은 5000여 명의 여성 중 자단과 가장 잘 어울리는 단 한 명의 여성을 꼽았고 자단은 힌 여성과 몇 차례의 데이트 이후 동거를 시작했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영어를 사용하는 남성과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여성이 AI 기반 립 더빙을 사용해 관계를 진전시켰다. 남성은 영어로 영상을 찍고, AI 기반 립 더빙 서비스는 내용을 번역해 스페인어로 된 영상을 전송했다. 《뉴욕타임스》는 AI와 데이트 과정이 결합하고 있다며 이러한 사례가 점차 더 확산할 것이라 평했다.

조언 플랫폼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도 여럿 등장했다. 플랫폼 ‘미노(Meeno)’는 AI를 활용해 연인, 친구, 동료, 부모와 소통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한다. 미노에 따르면 18~34세 호주, 뉴질랜드 남성 중 거의 절반(41퍼센트)이 관계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챗GPT를 사용했다. 데이트 도우미 앱인 ‘리즈(Rizz)’는 데이트 앱 사용자를 위한 답변을 제안하는 플랫폼이다. 리즈의 공동 창업자는 사용자들이 “장벽과 마찰 지점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 리즈에 온다”고 덧붙였다. 소개팅 어플리케이션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틴더는 AI가 사용자의 가장 매칭 확률이 높은 프로필 사진을 고르도록 하거나 불쾌한 메시지를 AI가 감지, 신고할 수 있도록 했다.

AI = 데이팅 플랫폼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전 세계 온라인 데이팅 플랫폼의 구독률은 81퍼센트 증가했다. 지난 한 해 동안 전 세계 데이팅 앱 시장에서 사람들이 쓴 금액은 57억 1820만 달러, 우리 돈으로는 7조 6910억 원에 달했다. 데이팅 어플리케이션 호황에 AI 기술이 접목되는 게 최근의 흐름이다. AI와 데이팅 어플리케이션의 만남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데이팅 플랫폼은 그 목적 자체가 빠르고 효율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데 있다. AI는 알고리즘과 개인화를 기반으로 원하는 목적에 가장 빠르게 도착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도구다. 그런 맥락에서 AI는 지금 사람들이 원하는 관계 형성의 모습과 가장 닮은 도구다.

AI 연인

AI는 이제 데이트의 보조 도구를 넘어서 관계 자체를 대체하고 있다. 정서적 교감을 위해 설계된 AI 기반 챗봇으로 유명세를 탄 ‘레플리카(Replika)’의 설립자인 에우제니아 쿠디아는 “챗봇과 낭만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에 갖는 낙인이 곧 사라질 것”이라 확신했다. 레플리카는 200만 명의 활성 사용자와 50만 명의 유료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한 미국 여성은 레플리카를 통해 가상의 남편을 만들고, 그와 결혼했다. 그녀는 AI 챗봇이 “완벽한 이상형”이며 “살면서 이보다 더 깊은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효율성

일견 AI의 관계 조언과 AI의 관계 대체는 별개의 흐름처럼 보이지만 관계에 대한 지향점이 효율성으로 바뀌었다는 데는 궤를 같이한다. 온라인 시대 이전, 관계를 만드는 방법은 복잡했다. 새로운 만남을 위해 밖을 나서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나의 조건에 부합하는 이들을 골라내야 했다. 시간과 비용을 무작정 투자해야 했고, 그것이 어렵다면 현재의 관계에 만족했다. 이제는 많은 과정이 자동화됐다. 플랫폼은 나와 가깝고 닮은 사람을 자동으로 알려 주고, 쉽게 채팅을 통해 접근할 수 있게끔 한다. 한국소비자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온라인 데이팅 서비스를 이용한 이유로 64퍼센트의 응답자가 ‘주위에 부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을, 54.7퍼센트가 ‘오프라인 소개보다 편리해서’를 택했다. AI 연인은 나의 모든 생활 패턴, 관심사에 맞춰 프로그래밍돼 있다. 골머리를 썩지 않아도, 많은 돈을 쓰지 않아도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질식 모델

가장 효율적인 관계를 맺고 싶다는 열망 이면에는 빠르게 완벽한 인연을 찾고 싶다는 갈증이 자리한다. 한 심리학 연구는 최근 몇십 년간 연인 관계에서 완벽함을 찾으려는 경향이 거세졌다고 지적하며 점차 결혼이 질식 모델로 변화해 왔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결혼 생활, 관계에 대한 완벽주의 성향이 생기면서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혼의 비율이 늘어났고, 이로 인해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해리 레이스(Harry Reis)는 온라인 데이팅이 무한한 옵션을 제공하면서 ‘완벽한 짝’이 존재한다는 잘못된 생각에 기여했다고 지적했다. Z세대의 완벽주의 문화는 데이팅과 관계에서도 작동하는, 세대적 감각이 됐다.

관계의 비용

관계의 효율성과 완벽주의는 관계에 쏟아야 하는 비용 자체가 크게 늘어 난 데서 기인한다. 리서치 기업 엠브레인의 트렌드 모니터에 따르면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으면 연애를 시작하지 않겠다는 응답이 2015년에는 38퍼센트에 불과했으나 6년 후인 2021년에는 47.1퍼센트로 늘었다. 비용의 범위도 확장됐다. 소셜 미디어를 타고 바깥으로 보이는 연애에 대한 부담감, 상시적 연결로 인해 감정 교류에 드는 비용의 증가도 관계의 지속을 막는 요소가 됐다. 연애 관계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구인 구직 매칭 플랫폼 ‘사람인’이 구직자 224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자신을 ‘아웃사이더’ 취준생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 중 스스로 아웃사이더를 자처했다는 응답이 55.7퍼센트에 달했다. 이유로는 44.7퍼센트가 ‘인간관계에 드는 비용이 부담스러워서’를 들었다. 이제 관계는 관계 그 자체만으로 가치를 지니기 어려워졌다.

IT MATTERS

AI와 데이팅 플랫폼은 완벽한 관계가 가능하다는 환상을 더더욱 키우고 있다. 매력적인 환상이다. 최근에는 스펙과 MBTI, 직장과 국적을 인증해야만 가입이 가능한 플랫폼도 인기다. 우연한 만남의 기회는 줄어들고 가장 효율적인 경로만 빛난다. 가성비와 완벽주의, 비용과 편익의 조건 아래 점차 더 많은 관계는 AI로 이전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AI가 너무 잘나서가 아니다. 기성 사회가 아직 새로운 관계의 지형도를 파악하지 못해서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저출생 대책 중 하나로 ‘서울팅’을 제안했다. 청년 1인 가구를 만나게 해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서울팅 계획은 쏟아지는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전면 재검토 절차를 밟은 바 있다. 단순한 만남과 연결, 일시적인 비용 지원은 지속 가능한 관계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지금 세대의 연애에서 쓰이는 비용을 다차원적으로 파악해야만 연애를 막는 심리적 장벽을 낮출 수 있다.

트러스트파일럿의 조사에 따르면 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인 중 30퍼센트는 연인과 함께 밸런타인데이를 축하하지 않았다. 사랑을 축하하기에는 초콜릿과 데이트가 너무 비싸다. 영화 〈그녀(Her)〉가 현실화하는 건 밸런타인데이에 대한 부담감이 극에 달했을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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