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의 K게임

2023년 10월 2일, explained

한국의 피노키오와 잠수부가 세계를 흔든다. 한국 게임의 지형도가 바뀌는 순간이다.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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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P의 거짓’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지난 9월 19일 출시된 한국 게임사 네오위즈의 대형 신작이다. 출시 전부터 업계 기대를 한몸에 받았고 출시 이후엔 메타크리틱 평점 80점을 기록했다. 언론이 이례적으로 P의 거짓을 주목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국내 점유율이 6퍼센트인 콘솔 게임이라는 점, 국내 유행과는 거리가 있는 마니악한 장르라는 점, 그럼에도 글로벌 시장에 안착했다는 점이다. P의 거짓은 현재 글로벌 게임 플랫폼 스팀(STEAM)에서 유료 게임 4위를 기록하고 있다.

WHY NOW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2 대한민국 게임백서’에 따르면 국내 게임 산업 매출액은 2021년을 기점으로 20조 원을 돌파했다. 이 중 11조 원은 국외에서 달성한 숫자다. 이는 한국 문화 콘텐츠 산업 전체 수출액의 66.5퍼센트에 해당한다. 한류 열풍을 대표하는 음악, 방송, 영화 산업의 수출액을 다 합해도 게임에 훨씬 못 미친다. 코인을 하지 않아도 코인을 아예 모르는 사람은 없다. 게임 산업을 아는 건 이제 교양의 영역이다. 한국 게임이 어떤 전환기에 들어섰는지 알아본다.

게임 강국이라는 수사

게임계 슈퍼스타 페이커의 결장에도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한국 e스포츠 리그 오브 레전드(LoL) 대표팀은 지난 9월 29일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e스포츠가 처음으로 국제 스포츠 대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가운데 한국이 명실공히 e스포츠 최강국으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한국 게이머의 실력은 프로와 아마추어를 불문하고 세계 최고로 꼽힌다. 국제 경기가 있는 게임에서의 외국인 선수 출전 제한 제도는 많은 경우 한국인을 제한하기 위한 제도로 기능한다. PC방의 보급과 한국 사회 특유의 경쟁 심리가 낳은 결과다. 많은 언론의 표현대로 게임 강국으로 불리는 데 손색이 없지만 단편적 수사는 늘 많은 것을 가린다. 게임 산업 이야기다.

높은 아시아 의존도

한국의 세계 게임 시장 점유율은 2021년 기준 7.6퍼센트로 미국, 중국, 일본에 이어 4위다. 같은 해 한국 게임 수출국의 비중은 중국이 34.1퍼센트로 압도적이고 동남아가 17퍼센트로 뒤를 잇는다. 북미와 유럽은 나란히 12.6퍼센트를 기록했다. 게이머는 세계적이지만 게임 산업은 아직 한 자릿수 점유율에 그치고 그나마도 아시아 의존도가 높은(70.4퍼센트) 것이다. 배경은 문화적 차이다. 한국은 IT 산업의 발달이 게임 문화를 견인했다. PC와 모바일 게임 비중이 크다. 일본과 서구 사회는 게임 산업의 발달이 더 빨랐다. 콘솔 게임기를 위주로 게임 문화가 형성됐다. 2022년 기준 세계 게임 시장에서 콘솔의 점유율은 28퍼센트다. 한국 콘솔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2021년 1.7퍼센트에 불과했다. 매출 구조 다변화를 위해 콘솔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다.

콘솔의 벽

사실 콘솔은 모바일 게임에 비해 수익성이 적다. 꾸준히 매출을 발생시키는 형태가 아니라 완성된 패키지를 한 번 팔고 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수익 구조도 복잡했다. 소비자가 게임 패키지 하나를 구매하면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이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 같은 콘솔 기기 회사, 패키지 판매를 담당한 각국의 유통사에도 수익을 배분해야 했다. 게임은 애초에 개발을 위한 인건비 등 고정비가 변동비보다 큰 산업이다. 패키지를 파는 콘솔의 경우 제대로 흥행하지 못하면 개발비 회수조차 어려워 수많은 게임 회사가 도산하곤 했다. 그러나 콘솔 시장이 CD 판매에서 디지털 다운로드(DL) 형식으로 바뀌며 현지 유통 비용이 줄고 업데이트도 간편해졌다. 북미와 유럽 점유율이 70퍼센트가 넘는 이 시장에 충분히 도전장을 내밀 수 있게 된 것이다.

게임 산업의 디리스킹

물론 성숙기에 접어든 콘솔 게임에 출사표를 내는 건 여전히 어려운 과제다. 그러나 이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다. 한국의 매출을 견인하는 중국은 거대한 게임 시장이지만 규제가 까다롭다. 중국의 미디어 감시 기구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은 자국 출시 게임에 대해 판호(版號)라는 인허가권을 부여한다. 게임 관련 지침에는 중국 체제나 주권을 위협하면 안 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세계적인 게임조차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 체제 전복을 상징하는 캐릭터를 제외하거나 일러스트를 수정해야 한다. 더군다나 판호는 일종의 ‘차이나 불리잉’으로 사용되곤 했다. 2017년 중국의 사드 보복 조치로 한한령이 내려지며 한국 기업들은 2018~2019년 판호를 받지 못했다. 제조업이나 첨단 산업과 마찬가지로 게임에서도 중국에의 ‘디리스킹’이 필요한 셈이다.

라이크의 덫

작고 포화 상태인 내수 시장에서 기업에 대한 유저의 신뢰 감소도 문제다. 판도라의 상자는 엔씨소프트(엔씨)와 넥슨이 열었다. 1998년 PC 온라인 게임으로 출시된 엔씨의 명작 리니지는 모바일로 넘어오며 유저의 천문학적인 과금을 끌어내는 비즈니스모델(BM)을 설계했다. 넥슨은 업계 최초 ‘부분 유료화’라는 과금 모델을 도입해 확률형 아이템의 시대를 열었다. 넥슨은 ‘돈슨’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게 됐다. 엔씨의 과금 구조는 업계 전반에 전염돼 일러스트와 스토리만 바꾼 ‘리니지 라이크’ 게임들을 양산시켰다. 2021년 6월 87만 원을 넘던 엔씨의 주가는 폭락을 거듭하며 현재 22만 원 수준이다. 유저들은 지갑을 열 만한 게임성을 요구하고 있다.

P의 거짓, 네오위즈의 진심

P의 거짓이 대단한 건 이러한 배경 위에 있다. 마니악한 콘솔 게임의 출시는 검증된 BM도, 검증된 플랫폼도 비껴갔다는 의미다. 특히 세계 골수 게이머로부터 고평가받는 일본 프롬소프트웨어의 게임 다크 소울 시리즈를 벤치마킹했다. 기대작으로 불린 이유다. 리니지 라이크가 경멸적 어조로 이해된다면 이른바 ‘소울 라이크’는 다크 소울류가 추구하는 극강의 난이도, 코스믹 호러를 연상케 하는 다크 판타지 세계관, 특유의 보스전과 조작법 등을 칭하는 장르 문법이다. 표절에 가깝다는 비판과 소울 라이크를 제대로 이해하고 만들었다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는 이유다. 네오위즈는 P의 거짓 출시 과정에서 어려운 상황임에도 개발비를 늘리며 적자 전환했는데 검증된 방법론으로 유저를 기만해 온 게임 대기업들과 달리 게임에 대한 진심이 느껴진다는 반응이 많다.

데이브더다이버, 넥슨의 개심

기존 대기업들도 잇따라 콘솔에 출사표를 내고 있다. 엔씨는 신작 쓰론 앤 리버티(TL)와 배틀크러시로 올해 하반기와 내년 콘솔 시장에 도전한다. 넷마블과 펄어비스도 기존 게임과 신작을 콘솔로 출시 예정이다. 특히 과거 게임 업계를 주름잡은 3N(엔씨, 넥슨, 넷마블)에서 독보적 1위로 올라서고 있는 넥슨은 해양 어드벤처 게임인 데이브더다이버를 내달 닌텐도 스위치 버전으로 출시한다. 문제는 콘솔이 만능 해답이 아니라는 점이다. 데이브더다이버는 지난 6월 PC 버전 발매 후 매출의 90퍼센트를 해외에서 달성하는 성과를 보였다. 이 같은 매출은 기존 대기업 게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게임성에 있다. 자극적이고 화려한 비주얼 없이 인디 게임처럼 재미에만 집중한 결과다. 데이브더다이버는 물고기를 잡아 초밥을 만들어 파는 게임이다.

IT MATTERS

P의 거짓은 카를로 콜로디 소설 《피노키오》를 잔혹 동화로 재해석해 벨 에포크 시대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싱글 플레이 게임이다. 제목의 P는 피노키오를 뜻한다. 작년 유럽 게임쇼 ‘게임스컴’에서 3관왕에 올랐다. 한국 게임으로는 최초다. 데이브더다이버의 주인공은 수염 난 배불뚝이 잠수부 아저씨다. 스팀의 평가는 호평 일색이다. 넥슨 게임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이 많다. 한국이 낳은 피노키오와 잠수부는 지금 세계 게임 시장에서 한국 게임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영웅 서사, 자극적인 코스튬, 무한 경쟁과 과금을 촉발하는 페이투윈(pay-to-win)에서 벗어나 새로운 게임성, 새로운 플랫폼, 새로운 시장으로 나아가는 거대한 전환기인 셈이다. 이들 게임은 비단 게이머의 기대만 짊어진 게 아니라 한국 문화 콘텐츠 수출을 견인하는 위치로서의 기대가 함께 걸려 있다.

콘솔 흥행의 지표는 통상 100만 장 판매다. 네오위즈는 아직 P의 거짓 판매량을 공개하지 않고 있으나 업계는 아무래도 숫자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주식 시장에서 소울 라이크 장르나 콘솔 시장에 대한 이해 없이 높은 전망치가 제시돼 네오위즈의 주가가 떨어지고 있지만 게임 업계에선 이를 회복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다만 P의 거짓이 100만 장 흥행에 실패하더라도 해외 진출의 꿈이 무산된 것은 아니다. 이미 콘솔 진출의 교두보가 마련됐고 게임성의 회복이라는 대과제가 내수와 해외 시장을 관통하는 열쇠임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K게임의 다음 목표는 고티(GOTY, Game Of The Year)다. 올해의 게임을 의미하는 고티는 매년 수많은 게임 단체와 게이머들에 의해 선정된다. 최다 고티를 받은 게임은 그 자체로 국가의 소프트파워가 된다. 북미와 유럽, 일본 게임이 점령한 최다 고티에 K게임이 오르는 순간 한국은 진정한 게임 강국으로 도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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