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지돈 - 우리 모두는 픽션 속에 산다.

우리 모두는 픽션 속에 산다
소설가 정지돈


가상과 현실에 대한 논의가 그 언제보다 넘쳐나는 지금, 소설가 정지돈의 신작 《…스크롤!》은 문학으로서 그 현실과 가상의 구분 자체에 질문을 던졌다. 현실은 팩트와 픽션의 뒤섞임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지금 여기를 잠식하고 있는 음모론에 대해 물었다.
올해 5월, 신간 《…스크롤!》을 발매했다. SF이면서 SF가 아닌 이상한 소설이라고 들었다.

《…스크롤!》은 두 가지 갈래로 전개되는 소설이다. ‘NE’ 라인은 일종의 SF로, 음모론을 수사하는 ‘미신 파괴자’와 ‘켄-D’라는 약물을 이용해 존재론적 행방불명자가 되는 이들을 다룬다. ‘SE'라인은 메타북스라는 서점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절반은 SF고 절반은 아닌 셈이다.

언제나 이분법을 넘어서는 글을 중시했다. 신간 《…스크롤!》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분법은 우리 사고에 큰 영향을 준다. 자연과 인공, 남과 여의 구분만 생각해 봐도 그렇다. 내가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건 ‘팩트’와 ‘픽션’의 구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이 먼저 있고, 그 현실을 반영하는 픽션이 소설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순서라면 현실을 기준으로 픽션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실 현실 자체가 픽션으로 구성돼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물리적 실제와 픽션이 뒤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스크롤!》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는 SF고, 나머지 하나는 현실이다. 누군가는 SF 라인을 픽션으로, 또 그것이 아닌 쪽을 현실이라고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결국 소설 속에서 둘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 심지어는 결말 부분에 가면 그 구분 자체가 무화된다. SF(Science Fiction)라는 말 자체도 온전한 픽션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에서 과학(Science)을 따로 구분할 수 없지 않나. 우리는 언제나 SF적인 세계에서 동시대를 살고 있다.

음모론에 대한 관심도 그로부터 출발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음모론은 현실에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모두 설명하는 비밀이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흥미로운 건 음모론을 만들고, 믿는 사람들이 사건과 진실 사이의 관계가 완벽하게 인과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현실에 완벽한 의도와 이유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인과적으로 완벽한 구조는 픽션적 상상의 영역이다. 음모론은 이 픽션의 구조를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전 세계가 음모론의 현실 침투랄까, 폭발을 목격했던 때가 큐아논(QAnon)의 국회의사당 점거였던 것 같다.

피자 게이트 같은 음모론들을 보며 흥미롭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굉장히 위험한 토대가 있다. ‘대체주의(Great Replacement)’라는 인종주의적 음모론이다. 흑인과 아시아인이 백인 문화를 위협한다는 식의 논리를 편다. 유럽에서도 크게 유행했고, 미국에도 엄청난 영향을 줬다. 장 르노 카뮈(Jean Renaud Camus)라는 프랑스 정치 철학자가 유색 인종이 백인 문화를 절멸시킬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에서 시작됐다. 수많은 총격 사건이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극우 정당들이 이를 내세웠다. 테러를 저지른 이들은 이미 백인과 유색인종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고 믿고 있다. 백인 노동자로서 총을 들고 이 공격에 대응하겠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큐아논이 믿는 거대각성지도(Great Awakening Map) 일부. ⓒhttps://www.greatawakeningmap.co/
한국과도 멀지 않은 이야기처럼 들린다.

최근 한국의 난민 혐오가 내게는 정말 이상하게 다가온다. 생각보다 더 강고하고, 난민들이 한국을 망칠 것이라는 걸 당연하게 믿고 있다. 정치권의 혐오 발언이나 커뮤니티의 언어도 문제지만 한국의 픽션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동포, 난민을 다룬 몇몇 영화들이 시간 때우기 식으로 소비됐지만, 사람들은 사소하게라도 그를 내면화했을 것이다. 초등학생들이 차를 쫓아오는 영상을 보며 ‘민식이 법’을 두려워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대체주의의 구조는 한국과도 멀지 않다. 그러나 그를 따르고 믿는 이들을 무작정 비판하는 것에서 조금 더 나아가야 한다. 이런 음모론적인 구조가 우리 사고의 근본적 틀을 이루고 있다는 걸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음모론은 분명 지금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힘을 실어주는 구조다. 그 메커니즘을 넘어서는 다음 단계의 문명을 생각하는 일이 필요하다.

듣다보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동이나 프로파간다와 같은 정치적 수사와도 유사해 보인다. 히틀러는 ‘유대인이 위대한 게르만을 망치고 있다’는 프로파간다를 폈다.

히틀러의 말은 분명 음모론이다. 음모론은 프로파간다보다 조금 더 보편적인 구조를 칭하는 것 같다. 모든 프로파간다가 음모론은 아니지만 프로파간다가 힘을 가지려면 음모론이 필요하다. 음모론은 비밀이 있고, 그 뒤에 진실이 있다는 식의 이분법을 차용한다. 그와 유사하게 프로파간다는 선과 악이 언제나 분명하다. 이 음모론적 구조를 가진 프로파간다는 모두가 사용한다. 우파도 쓰고, 좌파도 쓰고, 약자도 쓰고, 강자도 쓴다. 심지어는 예술 비평도 이런 언어를 사용한다. 몇몇 문학 비평들은 지금 유행하는 포스트 모던적이고 파편적인 서사가 아닌 평범하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서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식의 언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말 진실만을 말하는 문학이 있다’고 믿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음모론의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음모론은 역사적으로 늘 존재해 왔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음모론의 힘이 센 것 같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텍스트의 절대적인 양이 굉장히 많아졌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까지 많은 텍스트가 쏟아져 나온 때가 없었다. 지금은 모두가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댓글을 단다. 모두가 매일 읽고 매일 쓰는 셈이다. 옛날에는 글과 텍스트가 귀족의 것이었지만 지금은 모두의 것이다. 게다가 인터넷, 디지털, 웹이 그 무수한 텍스트와 결합돼 있다. 인터넷은 음모론이 자라날 수 있는 가장 비옥한 텃밭이다. 결국 세상은 음모론적인 사고와 구조가 확산하는 쪽으로 이동할 것이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를 어떻게 사유하고 조절할 것인가의 문제다.

지금의 정보 생산은 텍스트 뿐 아니라 딥페이크와 알고리즘까지 나아갔다. 새로운 기술들이 음모론을 더 격화시키기도 한다. 누군가는 유튜브의 가짜 뉴스를 믿고, 가짜 뉴스만을 생산하는 유사 언론까지 생긴 세상이다.

텍스트의 과잉은 가장 기본적인 토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거기에 기술까지 덧붙는다. 지금으로서는 먼 이야기지만 우려스러운 건 실제로 존재하는 진실보다 가짜가 더 힘을 발휘하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가짜의 힘이 더 세지는 상황을 우리가 막을 수 있을까? 어렵다고 생각한다. 막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가상, 혹은 가짜가 일종의 재현이라면 미디어 역사 자체가 재현의 수준을 올리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예전에는 글과 그림이 다였지만 이제는 VR과 3D프린터까지 가지 않았나. 이 기술의 발전을 막는 것보다는 그를 인식하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가짜 뉴스와 관련해 기억나는 흥미로운 사례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얼마 전 톰 크루즈가 내한을 했다. 그런데 톰 크루즈가 내한할 때마다 항상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일본에서 일본 기자에게 화를 내고 한국이 최고라는 식으로 말했다는 기사다. 유튜브 뉴스를 보면 CNN 로고까지 달려있다. 그런데 사실 CNN에 검색해보면 아무리 검색해도 그 기사가 안 나온다. 가짜 뉴스다. 사실은 정말 사소한 국뽕 콘텐츠다. 그런데도 댓글이 300개 이상 달린다. 일본에게 분노하고 톰 크루즈에게 호의적인 댓글들이다. 아주 사소한 거짓말이지만 그 안에 모든 서사들이 엮여 있다.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던 제국주의 시절, 한국이 일본을 싫어하는 ‘노재팬’ 정서, 백인 옹호 등이 뒤섞여 있는 거다. 사실 이 이데올로기들은 각자가 다 독립된 이데올로기지 않나. 미디어가 이 모든 것들을 엮고 있다.

최근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이들을 다뤘는데, 이들에게 있어 평평한 지구는 깨질 수 없는 믿음이다.

사실 우리가 문명 속에서 살아가려면 일종의 가치라고 하는 믿음 체계가 있어야 한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화폐도 사실은 다 믿음의 결정체다. 이를 테면 톰 크루즈가 일본을 욕했다는 식의 사소한 믿음도 자신이 갖고 있는 신념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믿고 있는 현실에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되는 정보를 받아들인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말하는 가설도 마찬가지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나 권력자가 우리를 속이고 있고, 자신은 진실을 안 소수라고 믿는다.

가치에 대한 믿음은 우리 모두가 내면화하고 있다.

픽션과 현실이 뒤섞이는 메커니즘 자체는 모두가 갖고 있다. 누군가는 인생의 의미를 가족에서 찾지만, 가족이라는 것의 중요성도 사회적으로 오랜 시간 형성된 픽션이지 않나. 음모론을 다루는 대부분의 논의는 “현실이 있는데 왜 현실을 안 봐!” 하는 식의 다그침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다. 거짓과 음모를 믿는 이들을 이상하다고 치부한다. 그런데 우리는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현실이 음모론으로 바뀌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믿음 체계를 우리 모두가 끊임없이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체계가 없는 이상 모든 가짜 뉴스와 신기술이 음모론이 될 수 있다. 다큐멘터리 〈웹 오브 메이크 빌리브〉는 ‘스와팅’이라고 불리는 장난 전화가 결과적으로 세 명의 죽음으로 이어졌던 사건을 다뤘다. 한국이라면 단순한 장난 전화로 끝날 수 있는 일인데 총기 사고에 민감한 미국의 현실, 경찰의 과잉 대응까지 복잡다단한 과정들이 엮여 살인까지 나아갔다. 지금은 그런 시대다. 사실이든 거짓이든 몇 차례 미디어를 거치면 살아 움직이게 된다. 모두가 픽션을 통해 움직이고 있고, 미디어가 그 픽션들을 연결하고 결합하게끔 한다. 가짜 뉴스가 위험한 이유다.

음모론의 창궐을 반지성주의와 연결하는 식의 논의도 많이 보인다.

사실은 반지성주의 자체를 진짜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큰 사회적 문제지만 정말로 문제가 되는 건 지성의 개념 자체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가짜 뉴스나 커뮤니티의 언어를 팩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반지성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문제가 되는 발언을 하는 사람들 중에 ‘지성인’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나. 장 르노 카뮈도 세계적인 학자다. 음모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평가와는 별개로 그들은 자기 자신을 지성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왜 지성을 둘러싸고 간극이 생긴다고 보나?

예전에는 지성을 담보하는 일정한 기준이 있었다. 학계의 인정이라든지, 권위를 가진 개인이나 매체의 발언이 그 기준이다. 이를 테면 누군가는 뉴욕타임스의 의견을 믿고, 누군가는 동네에서 떠도는 소문을 믿는다고 했을 때, 전자는 지성적이고 정상적인 믿음이고 후자는 아니라고 인식됐다. 그런데 지금은 정보를 생산하는 이들이 바뀌고, 미디어가 변화했다. 누군가에게 뉴욕타임스의 정보와 유튜브의 정보는 같은 정도의 무게감과 중요성을 가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전통적 기준으로 지성을 평가하려 한다. 과연 지금 옛날과 같은 방식의 권위적 기준이 세워질 수 있을까? 또 그것이 예전만큼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권위가 흩어진 상황에서 새로운 지성의 기준이 필요한 건 아닐까.

윌리엄 버로스의 소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들었다. 버로스의 소설 《네이키드 런치》는 외설물이라는 누명을 벗고자 1966년 재판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네이키드 런치》가 필요한 작업물이라는 것을 강조하더라. 음모론이 사회에 필요한 순기능을 줄 수 있다면 무엇이라고 보나?

음모론은 누구에게나 무기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약자에게 음모론은 구조를 바꿀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믿음을 줄 수도 있다. 《…스크롤!》에서도 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미신 파괴자는 ‘인도주의 양파 연합(인양연)’이 음모론을 퍼트리는 나쁜 곳이라고 표현하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그 판단이 모호해지는 때가 있다. 지금 현실에서 분명 음모론은 나쁜 곳에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조금 시각을 달리 보면 음모론은 생각의 핵심 속에 언제든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인도주의 양파 연합은 음모론을 통해 세력을 규합하고 세상을 구하려는 집단이 아니다. 중앙 집권적인 체제를 와해시키고, 각자가 각자의 믿음, 각자의 픽션, 각자의 세계에서 살아가게끔 하기 위해 음모론을 말하는 이들이다. 나는 그런 식이라면 음모론이 세상에 한 가지 재미있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이 음모론이라는 건 인식해야겠지만. (웃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네이키드 런치〉(1991)의 트레일러
때로는 이상한 상상과 믿음이 세상을 더 풍부하게 만든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음모론은 현실을 움직이는 픽션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음모론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에너지와 힘이 중요하다. 사유만 제대로 이뤄진다면 모두가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고 증폭하는 게 문명의 수준을 높이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옛날에는 좋은 글을 읽으려면 어렵게 책을 구해 읽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SNS와 블로그에도 좋은 글, 재미있는 상상이 너무 많다. 이들이 잘 발굴된다면 모두가 각자의 구조를 갖추고 새로운 현실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김혜림 에디터

* 2022년 6월 21일에 이메일로 전해 드린 ‘북저널리즘 톡스’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메일함에서 바로 받아 보시려면 뉴스레터를 구독해 주세요. 뉴스레터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