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김혜정 대표 - 숏폼의 시대, 긴 사유를 따라서

숏폼의 시대, 긴 사유를 따라서

그믐 김혜정 대표

국민 독서실태에 따르면 작년 한 해 종합 독서량은 인당 4.5권이었다. 독서하기 어려운 이유로는 ‘일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등이 언급됐다. 책과 멀어지고 있는 사회, 29일 동안 책 한 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온라인 공간이 있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김혜정 대표는 사비로 온라인 독서모임 플랫폼 ‘그믐(gmeum)’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고 말하는 김혜정 대표와 우리나라 독서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왜 지금 책인가.

긴 사고와 흐름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 요즘 세태다. 피드를 빠르게 넘기며 ‘좋아요’를 누른다. 하지만 느낌, 이미지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긴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극단으로 향할 위험이 크다. 달을 보라고 가리키면 손가락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책은 합의를 이뤄낸 사고가 쌓여 있는 아주 긴 사유의 집합이다. 긴 사유를 따라가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독서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훈련 방법 중 하나다.

그믐은 어떤 공간인가?

텍스트 기반 온라인 독서모임 플랫폼이다. 오프라인과 화상 독서 모임은 시공간의 제약이 있다. 가령 10명이라고 하면 그 인원의 일정을 맞추는 것 자체가 힘들다. 그믐은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독서후기를 남길 수 있다. 단, 한 모임은 최대 29일 동안만 운영된다.

왜 29일인가.

기한이 없다면 책이 아닌 다른 얘기를 하기 시작한다. 친목이 시작되는 것이다. 책에 관한 이야기만 나눈다는 원래의 목적을 유지하기 위해 기한을 마련했다. 29일은 달의 공전주기에서 따왔다.

어떤 책을 주로 읽나.

제한이 없다. 만화, 웹소설, 힐링 에세이 그리고 수학의 정석 등의 학술서도 가능하다. 책에 따라 모임의 목적은 공감대 형성이 될 수도 토론이 될 수도 있다. 모임의 특성을 규정하지 않는다. 그믐은 플랫폼일 뿐이다. 책과 관련된 것이면 어떤 것이든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다.

그믐의 특별한 점은 한번 단 댓글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오프라인, 오픈채팅방 독서모임의 아쉬운 점은 폐쇄성이다.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밖에서는 볼 수 없다. 누구나 오며가며 읽을 수 있도록 29일이 지나도 댓글은 그대로 남겨 놓는다. 또 삭제할 수도 없다. 시간이 지나 생각이 바뀌었다면 새로운 생각을 추가로 달면 된다.

‘좋아요’도 없다.

의견 간의 왜곡된 우열 관계를 없애고자 하는 것이다. 그믐 이용자들이 “그믐은 수평적인 사이트라서 좋다”고 한다. 댓글에 대한 찬반도 인기도도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의견에 우열이 생기지 않는다. ‘좋아요’가 200개 달린 의견이 있다면 동의하지 않아도 한번쯤은 본인의 생각을 검열하게 된다. 그믐에서 모든 댓글은 하나의 의견일 뿐이다. 이용자들이 ‘좋아요’에서 해방됐다고 표현한다.

그믐을 만든 계기가 궁금하다.  

호주에서 회계를 전공하고 외국계 회사 파이낸스팀에서 근무했다. 업계에서 연봉 올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이직이었다. 연봉을 올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하고 이직을 했다. 생존을 위해선 스펙을 갖추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을 했다. 계속해서 내 몸값이 얼만지 체크하는 삶을 10년 넘게 살았다. 그렇게 40대가 됐고 번아웃이 왔다. ‘후회는 없나?’ 스스로 질문을 던졌을 때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선택한 게 책이었나.

어릴 때부터 애독자였다. 책을 읽는 행위가 우리 사회에 줄 수 있는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 엄청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결제 기능이 없으면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하기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무료 온라인 독서모임 플랫폼 그믐을 만들었다.

책을 중심에 놓고 나누는 대화는 무엇이 다른가.

오랜만에 만난 사람와 나누는 대화를 생각해보면, 남의 얘기나 옛날 얘기로 흐른다. 시간이 지나 각자의 삶을 살면서 공통의 주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 대화를 나누고나면 뒷맛이 씁쓸하고 별로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책은 대화의 중심을 잡아준다. 흐르고 흘러도 다시 책으로 돌아온다. 그러다 내 안의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한다. 점심밥 먹다가는 할 수 없는 얘기들 말이다. 스스로를 대면하고 성숙해지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 독서모임을 자주 했나.

퇴직한 회사의 동료들을 주기적으로 만난다. 이제 서로 다른 직업과 생활을 가지다 보니 대화가 과거에만 머무르게 되더라. 새로운 걸 같이 하고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는 관계로 발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들에게 책 한 권을 정하고 다음에 만나면 그 책에 대해 얘기해보자고 제안했다. 다들 좋아했다.  ‘우리 만나면 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구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사람들이 읽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 바쁘다. 한국의 근로시간은 1915시간으로 OECD 평균을 3배 웃돈다. 또 퇴근해서 가만히 쉬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스펙 쌓기, 자기계발에 바쁘다. 독서는 적극적으로 글자를 쫓으면서 뇌를 굴려야 하는 행위다. 바쁘고 힘들다보니 책을 읽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책을 읽어야 한다는 죄책감이 든다. 현대인에게 독서는 정말 귀한 기회기 때문에 한 권이라도 정말 좋은 책을 읽고자 한다. 결국 유명인, 교수 추천 도서에서 찾아 읽게 되는 것이다.

책 대신 영상을 보기도 하는데.

영상이 주는 장점도 분명 있다. 그럼에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하자면, 학습 영상은 중요한 내용이 3분대에 나올지 11분대에 나올지 알 수 없다. 결국 다 보기 위해서 2배속을 한다. 하지만 책은 후루룩 훑을 수가 있다. 어떻게 보면 책도 여전히 효율적인 학습 도구다. 또 영화 등은 몰입도에 대한 변수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옛날 배경인데 주인공의 치아나 피부 상태가 좋은 경우라든가. 하지만 소설은 내 머릿속에서 제한 없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200년 전 영국 귀족에게도 몰입할 수 있게 하는 게 책이다. 책은 세상이 어떤지 내가 어떤지를 알 수 있는 도구인 동시에 현실에선 절대 경험할 수 없는 ‘나’가 될 수 있는 기회다.

잘 안 알려진 소설을 찾아 무료서평집 〈한국소설이 좋아서〉를 공동 기획하기도 했다. 

출판계는 신간 위주로 마케팅을 한다. 6개월만 지나도 관심이 시들해진다. 좋은 책이 논외로 밀려나는 게 아쉬웠다. 타이밍, 인지도 등 여러 이유로 묻힌 작품을 발굴하려고 했다. 숨겨진 책을 계속 끄집어내서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숨겨진 좋은 소설을 찾는 비결이 있는지?

도서관에 가서 서가를 걷다가 아무 책이나 5권 정도 뽑는다. 후루룩 훑고 별로다 싶으면 끝까지 보지 않는다. 그래야 다음 책을 읽을 수 있다. 핵심은 부담감을 버리고 다양하게 읽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이런 책들을 발견하는 건 한계가 있다. 메인 화면에 나올 수 있는 도서 수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서관 책장에서는 눈길 한번으로 몇 십권의 책을 볼 수 있다.

그믐엔 〈한국소설이 좋아서〉에서 소개된 작가와 연계한 프로그램도 있다. 확장 전략 중 하나였나.

북토크에 가면 작가가 한정된 시간 안에 한정된 질문을 소화한다. 시간은 짧고 보는 눈도 있으니 떨려서 제대로 된 질문을 하기도 쉽지 않다. 온라인에서 넉넉한 기간을 주면 어떨까 싶었다. 천천히 생각해서 29일 안에만 물으면 된다. 사고 간의 넉넉한 시간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연속성을 보장한다. 그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일반적인 강연의 형태에서 벗어나 북토크를 서로 간에 나누는 대화로 만드는 것이다. 책은 어떤 면에서 일방적이지만, 그 책을 쓴 작가와 수평적으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그믐이다.

그믐을 사비로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다. 〈한국소설이 좋아서〉도 무료 서평집이다. 지속성을 위해서 수익 모델도 필요할 것 같다.

사무실도 없고 온라인 비즈니스다 보니 서버비만 든다. 수익 모델을 찾고 있는 중이다. 반짝하는 성공보다 오래 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진심을 끈덕지게 외부에 알리다보면 될 거라 생각한다.

그믐은 온라인 플랫폼이지만 로컬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믐은 로컬 플랫폼을 표방한다. 온라인을 통한 소통이 기본이지만 동네책방 지원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매달 음력 29일 오후 7시 29분에 진행한다. 지역의 동네책방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비밀스럽게 모여 1시간 29분 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오프라인 독서모임은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이 사는 서울-경기권에 집중돼 있다. 쉽고 편안한 연결을 위해선 로컬 지원을 통해 문화의 근거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동네책방을 구심점으로 독서 네트워크가 풀뿌리처럼 퍼져 나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어떤 독서 생태계를 꿈꾸는가.

책과 삶이 분리되지 않고, 책이 일상에 자리하는 세상을 꿈꾼다. 세줄요약, 숏폼 등 짧은 호흡이 사회의 흐름이지만,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해야 하는가?’는 다른 얘기라고 생각한다. 거대한 흐름을 명백히 알고 있으면서도 작은 흐름에 동참하는 것은 큰 용기다. 그런 면에서 이건 저항 운동이다. 그 속에서 작은 흐름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기다리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생각이라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다같이 모였으면 좋겠다.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정원진 에디터

* 2022년 11월 22일에 이메일로 전해 드린 ‘북저널리즘 톡스’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메일함에서 바로 받아 보시려면 뉴스레터를 구독해 주세요. 뉴스레터 구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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